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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학생운동, 그 회고적 전망 (김정인)

현장연대 2003.12.02 09:08 조회 수 : 1487 추천:33

한국사회와 학생운동, 그 회고적 전망

김 정 인

1. 들어가며 : 위기인가? 정상화인가?  

학생운동의 위기, 90년대 이래 회자되는 그야말로 보편화된 담론이다. 보수·진보, 좌·우, 그 어떤 노선에 서 있던지 간에, 혹은 희색하며 혹은 심려하며 학생운동의 위기를 논한다. 학생운동 주도세력조차 상시적인 위기감에 시달린다. 위기담론의 근저에는 학생운동의 전형적인 상에 대한 고정관념이 깔려있다. 한국의 학생운동을 상징하는 것은 1960년 4·19와 1987년 6월 항쟁에서 '거리정치'에 나섰던 전투적인 대학생 이미지다. '학생운동다운 학생운동'에 대한 강박관념이 변화한 세계에 대한 코드 읽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또 다른 극단에서는 변혁의 희망을 잃은 허탈감으로 자기성찰의 이름을 걸고 자책에 가까운 자아비판에 몰두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학생운동의 정상화를 운위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군부와 함께 학생운동이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후진국에서나 가능한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학생운동의 역사적 역할은 지대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자산계급이 취약하고 또한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상황에서 종교세력이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여 자산계급이 수행해야 할 역사적 역할을 충실히 대행했다.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학생운동은 자산계급·시민계층을 대신해 민주화운동을 주도했고 분단과 함께 반공주의의 폭압으로 잠복하고 만 민중운동의 전통을 복원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다. 지금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은 학생운동의 공적을 토양삼아 독자적 입지를 구축한 상태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 학생운동의 역사적 역할은 종언을 고해야 하는가. 혹자의 말처럼 이제 학생운동은 정치적 색채를 벗고 학생대중의 곁으로 돌아가 그들의 권익을 적극 옹호하는 자치활동에 만족해야 하는가.        
위기라는 진단과 정상화라는 평가가 부분적으로는 모두 옳은 지적일 수 있다. 학생운동이 일구어 낸 최대성과인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민족주의의 진전과 함께 오히려 민족민주운동의 주도권을 상실해가는 '역설'은 역사발전의 자연스러운 소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문해보자.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 변해야 하는 것과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는 강박과 결벽은 분명 합리성이 결여된 태도이다. 변(變)과 불변(不變), 현실과 당위의 엉켜진 실타래를 풀어내며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이 지금의 학생운동세력에 절실히 요구되는 안목이다.
학생운동이 위기감을 떨쳐내고 나름의 정로(正路)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친미-독재-반공의 공고한 성벽을 허물고 민족주의·민주주의·민중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학생운동의 과제가 과연 얼마나 해결되었느냐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제 깃발을 내려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해방 이후 한국사회와 학생운동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 속에 있다. 제 몫을 다하는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을 계승하고 혁신할 것인지 하는 모색 역시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 반성적 성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2. 찬란한 과거 : 민주화 투쟁 시대의 학생운동, 그리고 '三民'    

1) 1960년대 :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제기  

4·19는 민주주의 이념에 토대를 둔 항쟁이었다. 4·19를 촉발시킨 것은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한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白色) 전제주의'에 저항했다. 학생들은 선봉에 섰고 많은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일반 학생들의 인식 수준은 극히 초보적이었다. 4·19 데모 당시 대학생들은 '기성세대는 각성하라' 차원의 분노를 표출했을 뿐이다. 오히려 4·25 교수시위에서 처음으로 교수들이 '이승만정권 물러나라'고 주장했다. 민중지향적 대학생은 드물었고 시위 지도자들은 선민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서울대학생들이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고 외쳤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반공주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4·19 이후 신생활운동, 국민계몽운동 등 선민주의적인 계몽운동에 몰두하던 학생들은 점차 자주화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들은 초보적 인식단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분단과 통일문제를 전면에 내걸었고 민족주의적·평등주의적 가치를 추구했다. 1961년 2·8 한미협정 체결 즈음에 조직된 '전국학생 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위원회'는 2월 14일 발표한 「대정부 및 국회 건의문」에서 한미협정의 폐기를 주장했다. 서울대에서 나온 「4월 혁명 제2선언문」은 '지금 이 땅의 역사사실을 전진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반봉건, 반외압세력, 반매판자본 위에 세워지는 민족혁명을 이룩하는 길 뿐'이라고 선언하며 3반(反)의 과제를 제시했다. 학생의 통일운동은 민족통일연맹(민통련)으로 조직화되었다. 1961년 5월 3일 민통련은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했다.
자주화와 통일에 대한 학생들의 문제제기는 선도성이 강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통련 주요 지도자 상당수는 친체제적이었다. 5·16쿠데타가 발발하자 5월 23일 서울대학생회는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혁신계와 통일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이 체포되고 반공법이 제정되는 와중에도 군부에 대한 기대는 계속되었다. 대학생들은 군사정부 주도의 향토개척단 운동에 참여했다. 학생들의 군사정부에 대한 지지와 참여는 구정치와 구세대에 대한 실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군정에 대한 실망이 점차 커지면서 군부와 학생운동의 30여년에 걸친 길고 긴 투쟁이 시작되었다. 군부는 학생운동의 타도대상이 되었다. 역으로 군부의 최대 천적은 학생이었다. 군부는 5·16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여 30여 년을 통치하며 산업화를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성장주의가 정립되어 반공주의와 결합하면서 확산되어갔다. 그들에게 산업화는 곧 공업화였다. 그들은 선성장 후분배, 선경제 후통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외국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 재벌과 특정지역 중심의 불균등 발전 전략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대외 종속이 심화되었고 기층 민중의 저항은 철저히 억압당했다. 결국 군부통치는 친미반공의 파시즘으로 귀결되고 산업화의 과제가 절대화되면서 자주와 통일의 민족문제뿐 아니라 민주화, 평등, 평화, 환경 등 나머지 가치들은 무시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군부에 대한 학생운동의 도전은 1962년 한미행정협정 체결 반대시위로 시작되었다. 군정 연장에 대한 반대 시위도 시도되었다. 마침내 민정을 표방하는 박정희정권이 수립한 후 군부와 학생은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체결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충돌했다. 1964년 3월 24일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는 주동자들이 반정부적 성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4·19 당시의 주동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반제국주의적 가치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우리의 결의와 행동이 신제국주의자에 대한 반대투쟁의 기점'이라는 천명이 그것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거행된 4·19 기념식에서는 '한일굴욕회담 반대'와 함께 '5·16은 4·19의 배반'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주도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대학생들의 5·16과 박정희정권에 대한 인식 전환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일굴욕회담반대 대학생총연합회'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문「5·16을 비판한다」에서 학생들은 '우리는 외세의존의 모든 사상과 제도의 근본적 개혁 없이는, 전체 국민의 희생 위에 홀로 군림하는 매판자본의 타도 없이는, 외세의존과 그 주구 매판자본을 지지하는 정치질서의 철폐 없이는, 민족자립으로 가는 어떠한 길도 폐쇄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군사쿠데타 세력이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총칼의 공포정치 아래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는 역사적 퇴보를 강요하였다.'고 비판하며 혁명공약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처럼 굴욕적인 한일회담과정을 통해 박정희정권의 민족·민중적 측면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불식되었다. 민족주의는 본래 보수적 이념이지만 분단과 종속이라는 현실에서 진보적 성향을 강하게 지닌다. 한국적 상황에서 민족주의의 핵심가치가 자주와 통일이므로 친미-반공과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6·3 당시 학생들은 노골적인 반미를 내걸지는 않았다. 미국이 이 회담의 강력한 배후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다. 다만 '미국은 한일회담에 간여하지 말 것', '학생을 탄압하는 정부를 지원하지 말 것' 등의 구호를 선창하는 정도였다. '제국주의체제에 대한 비판 없는 반일', '반미 없는 반일'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월남파병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부재를 초래했다.  
6·3을 거치면서 성장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연대가 형성되었다. 애매모호하던 전선과 이념이 분명해지고 대립구도가 분명해졌다. 박정희정권은 초기의 혼돈과 모호함을 극복하고 성장주의적 성격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또한 성장주의 성과에 자신을 가지면서 학생운동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위수령을 선포하여 대학을 폐쇄하거나 혹은 대학에 무장군인을 주둔시켰다. 학생운동 탄압을 위한 제도적 장치도 구축해나갔다. 학원안정법 제정을 시도했고 대학군사훈련교육방침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6·8부정선거 규탄데모와  3선 개헌 반대데모를 주도하면서 저항했으나 휴교나 조기방학 조치로 압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1967년의 동백림사건과 민족주의비교연구회사건, 1968년 통혁당사건, 무장게릴라 침입사건 등으로 성장주의의 비호 하에 반공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반외세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저항운동의 가능성은 잠재화되었고 유신체제하에서는 부활하지 못한 채 80년대를 기다려야 했다.  

2) 유신체제기 : 민중주의의 정립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과 1971년 8월 10일 광주 대단지 사건 등은 평등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평등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반공주의가 전횡하던 시대에는 가장 위험시되는 가치였다. 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공산주의와의 차이를 강조하던 평등주의자들은 5·16 이후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로 분식하거나 잠복했다. 평등주의는 반공 체제하에서 민족주의를 적극 수용하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탄압의 예봉을 피했고 또 지지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7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노동자계급이 대거 형성되고 불평등이 심각해지면서 평등이란 가치는 더욱 중시되었고 평등주의의 한국적 형태인 민중주의가 정립되었다.
민중주의의 등장에 대해 성장주의는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 1971년 국가비상사태선언, 국가 보위를 위한 특별조치법, 1972년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8·3사채동결) 등으로 대응했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는 반공과 성장주의를 배타적으로 관철하기 위한 비상조치였다. 박정희정권은 자신에 반대하는 어떤 세력에 대해서도 일본 제국주의자들보다 더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러한 비상체제는 독재 대 민주라는 대립구도를 전면화 시켰다. 남북정권간의 합의로 7·4남북공동성명이 전격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개발독재 노선의 유신체제 하에서 민족주의는 설 땅이 없었다. 민족주의가 잠복하고 민중주의가 정립되는 가운데 70년대 저항운동은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투쟁에 집중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족·민주·민중 등 각 가치들의 차별성과 독자성은 약화되고 민주주의 이념의 주도성이 강화되었다.
유신체제하에서 긴급조치의 남발로 폭압이 강화될수록 민주화운동은 탄압에 따른 휴지기를 거쳐 격렬하게 저항하는 양상을 반복했다. 그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1971년의 '부정선거반대투쟁', '교련반대투쟁', '학원자유수호운동' 등을 주도한 세력 역시 학생들이었다. 여기에는 박정희정권의 혹독한 물리적 탄압이 뒤따랐다. 군대가 대학에 진주했고 상당수의 학생들이 연행되거나 제적당했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 이후 반년도 되지 않아 또다시 학생들이 유신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함성지 사건, 민우지 사건, 야생화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났고 1973년 10월부터는 학생시위, 동맹휴학, 시험거부 등이 빈발했다. 유신정권은 또다시 학생 연행과 구속, 제명처분 등의 강공책으로 응수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합회사건)'이 발발했다. 70년대 학생운동을 대표하는 민청학련은 개별학교 단위의 반정부시위를 넘어서서 전국적인 조직 결성 및 동시 궐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이전 학생운동의 수준을 한 단계 뛰어넘는 것이었다. 당시 학생운동은 6·3사태 이후 10년간의 운동을 반성하면서 비판적 구호 차원이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 분단민족의 향방을 제시하기 위한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운동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된다. 민청학련은「민중 민족 민주 선언」을 통해 성장주의 개발독재에 저항하기 위한 운동논리로 민족·민주·민중의 삼민 이념을 제시하고 반민주적·반민중적·반민족적 집단에 대한 분쇄 의지를 확고히 천명했다. 60년대의 3반이 3민으로 중심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청학련이 「민중 민족 민주 선언」,「민중의 소리」 등의 문건에서 '민중'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이다. 이는 당시 학생운동이 민주화투쟁에 역량을 집중하고는 있었지만, 평등주의·민중주의에 대해 인식과 실천의 폭이 넓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70년대 학생운동에서 민중주의는 민중의 실태에 관한 조사를 비롯하여 민중운동과의 연대 혹은 직접 투신 등의 방식으로 관철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타격을 받았던 학생들의 반유신투쟁이 1975년 봄 다시 시작되자, 박정희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이후 학생운동은 투쟁공간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공개활동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학생운동가들은 소영웅주의적이고 낭만적인 학생운동이 아니라 이념과 조직에 기초한 학생운동을 구상했다.    
유신독재체제에 맞서는 운동노선으로 우선 현장론이 대두했다. 현장론은 7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자본주의적 모순이 가시화되면서 노동운동이 발전하고 노동문제가 사회문제화 되던 시류를 토대로 등장한 것이었다.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이 갖는 한계를 인식하면서 학생운동은 기층민중을 주체로 하는 변혁역량을 구축하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었다. 학생운동만으로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므로 노동현장에서 노동대중을 의식화·조직화하는 투쟁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투쟁 역시 포기할 수 없는 노선이었다. '지금같이 탄압이 극대화한 시기에 학생운동마저 정치투쟁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전체운동은 자기패배에 빠지고 말 것이다'라는 위기의식이 치열한 정치투쟁을 촉구하고 있었다. 역시 유신정권 붕괴의 견인차는 학생들이었다. 1978년 6월의 광화문시위는 학생들의 반유신투쟁이 대중투쟁으로 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학생들의 선도적 투쟁과 대중투쟁의 결합은 1979년 부마항쟁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3) 1980년대 : 민중주의의 만개(滿開)와 민족주의의 부활  

민중주의의 지평을 확대하고 민주화운동을 통해 유신체제 붕괴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학생운동의 전통을 토대로 80년대 학생운동은 광주항쟁의 좌절과 신군부의 등장이라는 '퇴행적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1980년 12월 11일 서울대생 1천여 명이 시위를 전개하며 살포한「반파쇼 학우 투쟁 선언」은 투쟁의 궁극적 과제가 '민중이 주체가 되는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반미자주화의 노선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민중주의적 변혁에 대한 열망과 통일 민족국가 수립의 당위를 명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시위부터 전두환 신군부정권이 학생들에게 '좌경화'의 올가미를 씌웠다고 한다. 80년대에 들어와 학생운동은 '무림-학림 논쟁', '야비-전망 논쟁', '깃발-반깃발 논쟁',  'MC-MT 논쟁',  'CNP논쟁' 등을 통해 민중주의에 기반한 변혁의 전망을 제시하고 그에 입각한 당면과제를 설정하는 이론투쟁기를 거쳤다.
이처럼 8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민중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변혁운동의 전망을 마련한 데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대한 항거가 곧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므로 반제국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주의는 학생들에게 항일투쟁의 사상적 기초였다. 해방 후에도 좌익·사회주의 세력이 압도했으나, 6·25남북전쟁 이후 학생운동 내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마침내 민중주의는 80년대 초 학생운동의 이론투쟁을 통해 수십 년 만에 공개적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에서 1982년 3월 18일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생 주동자들은 미국에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신군부정권에 대한 지원철회를 요구했다. 그들은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살포했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경제수탈을 위한 것으로 일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소위 우방이라는 명목 하에, 국내독점자본과 결탁하여 매판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지배논리에 순응하도록 강요해왔다. 우리 민중의 염원인 민주화, 사회개혁, 통일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파쇼 군부정권을 지원하여 민족분단을 고정화시켰다. 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국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시민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
학생들은 민중주의 이념을 기초로 민족문제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한국사회에 제국주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본원적인 회의를 야기했다. 미국은 자신의 이해를 옹호하기 위해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1983년 말 유화국면이 도래했고 1984년에는 학원자율화조치가 발표되었다. 이 조치의 본래 목적은 학원 내 정치활동을 용인함으로써 학생운동이 비합법적 활동기간 동안 누려온 선도적 상징성을 봉쇄하고 학생운동권의 '좌경적' 이념이 일반 학생에게 확산되는 것을 막는데 있었다. 하지만, 학생운동은 이 합법적 활동공간을 학생회를 건설하고 집회와 시위 등을 통해 정치투쟁을 전개하면서 학생운동 역량을 축적하는데 십분 활용했다. 그리고 각각의 정파와 노선에 따라 비중을 달리하며 민중생존권투쟁, 반미자주화운동, 반파쇼민주화운동에 자신들의 역량을 투여했다. 민중생존권투쟁의 핵심고리였던 노학연대는 각 노동조합의 투쟁에 동참하거나 공단지역에서 기습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직접 노동현장에 투신하는 학생운동가들도 급속히 늘어갔다.  
반미자주화운동의 상징적 사건은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이었다. 농성학생들은 성명서를 통해 '①광주 학살 지원 책임지고 미국 행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②미국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 ③미국 국민은 한미관계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라' 등의 반미적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신군부정권을 광주학살의 책임자로 부각시키면서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반미자주화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상징하는 사건은 1986년 전방입소거부투쟁이었다. 학생들은 전방입소를 '미제의 용병교육'이라며 거부했다. 그 해 5·3 인천시위에서는 '군사독재 앞장세워 광주민중 학살하고 노동자 농민 피땀 짜는 미국 놈들 몰아내자'라는 구체적 구호가 등장했다. '주한미군 철수하라'는 더 이상 낯설고 충격적인 구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반공주의 체제하에서 반미는 친공산 혹은 친북 논리와 동일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좌경용공의 폭력집단'으로 매도되었고 1000여명이 넘는 학생이 구속되는 '건국대 사건'의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1986년 개헌투쟁을 시작으로 학생운동의 투쟁역량은 직선제 쟁취를 위한 반파쇼민주화운동에 집중되었다. 개헌투쟁은 '전두환 일당을 고립 처단하는 투쟁이자 민중이 주체가 되어 수행하는 애국적인 민주권리획득투쟁'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학생운동은 야당인 신민당과 공동투쟁에 참여하는 등 모든 민주화세력과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1987년 2월에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살인사건은 반파쇼 민주화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4월 13일 직선제 개헌을 거부한 전두환정권의 '호헌조치' 표명은 대중적 분노를 야기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주최로 개최한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수만의 시민과 학생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연호하면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명동성당의 농성으로 이어졌다. 6월 항쟁에서 학생운동은 헌신적이고 완강한 투쟁으로 대중투쟁의 돌파구를 열었다. 그리고 농성투쟁, 대중선전활동 등을 통해 지속적 투쟁에 일익을 담당했다. 특히 지방 중소도시 대학생들의 투쟁은 항쟁의 전국적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80년대 학생운동은 대학이 선민교육이 아닌 대중교육의 장으로 전화되면서 양적으로 확산된 학생대중을 기반으로 민중주의의 확산을 주도하고 민족주의 부활의 단초를 마련하면서 동시에 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6월 항쟁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학생운동은 군부와의 지난한 투쟁에서 사실상 승리하면서 '역사의 주체' 혹은 '혁명투사'로 대중적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

3. 형극의 오늘 : 민족주의적 투쟁과 '신'민주주의적 모색
              
1) 통일운동과 '마녀사냥'

6월 항쟁의 승리는 '한 여름밤의 꿈'으로 끝났다.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학생운동세력은 비판적지지, 단일후보론, 민중후보론으로 각기 입장을 달리 했고, 신군부 '5적'의 일원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절망해야 했다. 군정종식에 실패한 학생운동이 재기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은 1988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통일운동이었다.
통일운동을 선도한 것은 1986년 3월 자민투(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를 결성한 이래 학생운동의 주류를 장악했던 NL(민족해방)계였다. 자민투는 결성당시부터 '반미자주화투쟁'을 정점으로 '반파쇼민주화투쟁'과 함께 '조국통일촉진투쟁'을 주요 투쟁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자민투는 본격적인 통일투쟁에 나서지 않았지만 통일운동노선에 대한 분명한 자기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조국통일촉진투쟁의 대원칙으로 7·4 남북공동선언에서 남북정권이 천명한 바 있는 '자주적 통일·평화적 통일·민족적 대단결'을 제시했다. 구체적인 투쟁목표로는 미군철수, 군통수권 반환,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치, 남북상호불가침조약의 체결 등을 내세웠다.
1988년 이후 통일운동을 주도한 학생조직은 6월 민주화투쟁의 산물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었다. 1988년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 김중기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에게 '남북한 대학생 공동체육대회와 국토순례대행진 개최'를 전격 제안했다. 5월 15일에는 서울대생 조성만이 명동성당에서 '미국반대·조국통일'을 외치며 투신자살했다. 6월 10일에는 전대협 주도하에 '남북대학생 판문점 회담'을 위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6·10남북학생회담 출정식에서 발표된 성명서 「애국의 길, 통일의 길을 걷고자 하는 국민여러분께」는 통일운동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었다.

저희 청년학생들은 민족의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에서 지금 한반도가 남과 북의 대결 반목 질시 그리고 긴장 고조의 위중함에 통일은 물론 민족의 존망까지 위태롭게 하기에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의 화해, 단합이 절실히 요청됨을 이해하고 이를 위한 출발점으로 6·10남북청년학생회담을 수행코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학생운동이 앞으로 본격적인 통일운동에 매진하겠다는 천명이었다. 통일운동과 함께 반공적 시각으로 왜곡된 북한을 제대로 알자는 '북한바로알기운동'도 전개했다. 학생들의 통일운동은 대내적 여건이 아직 통일운동의 주체역량이 꾸려질 만큼 충분히 성숙되지 않는 상황에서 분출한 것으로 선도투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노태우 정권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6·10대회에 대한 대책을 숙의하고 이어 정부는 남북한 학생교류를 주선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남북간 상호교류를 촉진한다는 내용을 담은 7·7선언을 발표했다.  
1989년에 들어서면서 전대협의 통일운동은 북한에 직접 대표를 파견하는 등 급진적인 양상을 띠었다. 전대협은 평양에서 개최되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 대표를 파견했다. 그해에는 임수경만이 아니라 문익환 목사, 서경원 국회의원 등이 방북했다. 연이은  방북사건을 빌미로 수세적 국면을 벗어났다고 판단한 노태우 정권은 통일운동에 대한 전면 탄압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공안합수부가 그 선봉에 섰다. 공안합수부는 '자주·민주·통일 그룹사건(1990. 10. 26)', '조국통일촉진그룹사건(1991. 3. 22)' 등을 연이어 터뜨리며 전대협의 통일운동을 '친북좌익세력의 책동에 의한 것'으로 매도했다. 하지만, 노태우정권의 기대와는 달리 학생들의 통일운동이 반공주의의 성역을 일정정도 무너뜨리고 북한에 대한 새로운 인식전환을 가져오면서 통일문제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통일운동의 활성화를 가져온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처럼 학생운동이 선도적으로 통일문제를 본격 제기하자, 친미반공노선의 수구보수세력은 종전처럼 정권에만 의탁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언론매체 등을 통한 공세에 나섰다. 반공독재를 타파하고 민주화의 시대를 맞아 새롭게 자주와 통일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세대'가 세력화하면서 남남갈등이 부상한 것이다. 1993년 전대협을 계승한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결성되자 수구보수세력은 강령이 친북적이라며 시비를 걸었다. 문제가 된 강령은 '미국을 반대하고 모든 외세의 부당한 정치, 군사, 경제, 문화적 간섭과 침략을 막아내고 목숨보다 소중한 민족자주권을 회복하여 조국의 자주화를 이룩한다'는 제1항과 '조국의 영구분단을 막아내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아래 연방제로 조국을 통일한다'는 제3항이었다. 반미자주화와 연방제 통일은 반공주의자들이 볼 때, 북한정권의 주장과 다를 바 없었다.
문민정부라는 김영삼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한총련의 통일운동과 이에 대한 정권의 탄압은 되풀이되었다. 정권 초기에는 전남대를 주축으로 하는 남총련의 급진적인 반미자주화투쟁이 통일운동을 압도했다. 남총련은 농산물 수입개방에 반대하는 반미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면서 광주 미문화원을 3차례 기습했다. 반미자주화투쟁과 함께 동아대·전남대 등에서의 인공기 게양 사건, 한총련 기관지 『대학생』에 김일성의 신년사가 게재된 사건,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에 전남대에 분향소가 설치된 사건 등 학생운동의 '친북적' 행태가 수구보수세력을 더욱 자극했다. 그들은 한총련을 'NL주사파로 이루어진 친북용공성이 짙은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조선노동당의 이중대'로 부르기를 서슴치 않았다.  
통일운동을 둘러싼 학생운동과 정권간의 긴장은 팽팽한 가운데, 1996년 8월 한총련이 범청학련(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주최의 통일대축전을 강행하고 이를 김영삼 정권이 강경진압하여 수많은 시국사범을 양산했던 '연세대 사건'이 발생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연세대 사건을 '과거 독재와 맞서 싸웠던 민주학생운동과는 달리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맹종하고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을 지지하는 위험천만한 혁명운동'으로 치부했다. '민주화 투쟁의 주역이었던 학생운동이 90년대에 들어와 친북성향을 보이면서 변질되었다'는 반공주의 담론은 당시 수구보수세력의 단골메뉴였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연세대 사건을 '북한의 대남혁명전략동조자들에 의한 불법폭력시위와 이를 진압하려는 공권력의 행사가 빚어낸 충돌사태'로 인식했다. 검찰은 한총련을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 연방제 통일 등을 주장하며 한국사회를 미국의 식민지대리정권으로 규정하는 등 그 투쟁전략이 북한의 대남혁명전략과 일치하는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그리고 국가안전기획부, 경찰청, 국군기무사령부, 교육부 등과 함께 '한총련 좌익사범 합동수사본부'를 공식 발족시켰다. 반미와 친북을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친미반공노선의 지배권력에 의해 대중적 학생운동조직의 연합체인 한총련은 '이적단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국가권력과 대적해야 했다.  
연세대 사건 이후 수구보수세력은 한총련의 해체를 공언했다. 그들은 연세대 사건이 일본 전공투 사건의 재판이길 고대했다. 일본의 학생운동이 전공투 사건 이후 종말을 고했기 때문이다. 서강대 총장이자 신부인 박홍은 『레드 바이러스』를 출간하며 한총련에 대한 '마녀사냥'에 앞장섰다. 박홍은 '정의와 진리를 위해 불같이 뜨거운 정열로 온갖 희생과 불이익을 마다하지 않는 순수함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불의를 정의로, 폭력을 비폭력으로, 불신을 신뢰로 군부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항해 온 것이 한국 학생운동의 전통이고 자랑'이라고 운을 뗀 뒤, 90년대를 넘어오면서 이러한 학생운동이 점차 변질되어 폭력성과 좌경사상성(친북 반정부 반미 폭력투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레드바이러스인 '주체사상, 맑스·레닌사상'은 인간의 빵문제와 자유문제 그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에 감염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는 성장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친미 반공주의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언급이다. 그가 내놓은 대안은 우파의 전통적인 진화논리인 생명가치·공동선·연대성의 가치를 내면화하는 교육, 즉 인간개조였다. 송복, 양호민 등의 보수논객도 '대학이 주사파의 천국이요, 김일성 망령으로 가득 차 있다.'고 개탄하며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나서 학생들의 폭력난동을 말려야 한다고 거들었다. 『한국논단』,  『공안연구』, 『자유공론』, 『민족정론』, 『자유』 등의 극우 성향의 잡지들은 매호 한총련을 친북과격단체로 다루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국사회의 주류인 그들이 과도할 정도로 학생운동을 의식하면서 사상투쟁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학생운동이 여전히 비중 있는 민족적·사회적 변혁세력으로 그들의 경계대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일로에 있는 시민운동·민중운동에 감히 덫 씌울 수 없는 좌경·용공·친북의 올가미는 그렇게 '위험천만의' 자주화 통일운동을 전개하는 학생운동을 옭아매는데 이용되었다.
연세대 사건 이후 한총련은 조직와해의 위기를 맞았다. 한총련은 1997년에 들어와서도 4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반미투쟁 강화, 범청학련 강화'와 함께 정권타도운동을 공식선언하며 정치투쟁 일변도의 강경노선을 고수했다. 그런데, 6월 4일 한양대에 자리한 한총련 임시 사무실에서 이석씨가 경찰 프락치로 몰리면서 학생들에 의해 치사당하는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미 연세대 사건 당시에도 전경인 김종희 이경이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사망한 적이 있었다. 한총련의 '보수'적인 강경노선이 빚은 비극에 일반 국민은 물론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세력까지 거센 비판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한총련이 이 사태를 철저한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아 국민과 함께 하는 운동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했다. 사면초가의 한총련에 대해 김영삼정권은 검찰과 경찰 합동의 전담반을 편성해 와해작전에 돌입했다. 한총련 소속 학생회 간부에게는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가입이라는 죄목을 들어 강제탈퇴를 종용했다. 법원은 한총련은 이적단체라는 판결을 내려 그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한총련의 위기상황과는 달리 통일운동은 90년대 후반 들어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루고 있었다.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한총련을 '통일지상주의자요, 좌익 모험주의자'로 비판하면서 새로운 통일운동을 모색하는 그룹들이 등장했다. 가령, 1999년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은 '평화21' 행사를 통해 한총련이 통일이라는 구호자체를 좌경시하는 풍토를 극복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남북한 군사대결의 구조를 깨는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하면서 평화정착을 위한 우회적이고 다층적인 전략을 개발할 것을 주장했다. 그들이 상정한 통일운동으로는 북한동포돕기운동, 동북아 평화네트워크 형성, 국가보안법 철폐운동 등이 있었다. 이들은 한총련이 '협소한 민족주의'의 틀을 갖고 있어 결국 평화정착과 통일에 장애물이 될 것을 우려했다. 이들의 '탈민족주의'적 지향의 통일운동은 통일을 전제한 이상 그 역시 현실적 맥락에서는 민족주의적 실천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시민운동단체인 경실련의 대학생회는 한총련이 주축이 된 통일운동을 무조건적으로 통일을 외치는 감정적인 것으로 비판하면서 '구체적인 통일의 과정과 비용을 점검하고 통일을 위한 학생의 역할을 조심스럽게 찾아가는 합리적인 통일운동'을 제안했다. 이는 선도투쟁으로서의 통일운동보다는 통일에 대비하는 운동이 학생운동답다는 우파적 전통의 '준비론적 시각'을 전제한 것이었다.
통일운동의 획기적 전기는 한총련의 과격노선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통일운동조차 외면당하던 1997년에 시민·사회단체들이 주도했던 북한돕기운동이었다. 이 운동에는 수백 개의 단체의 주도하에 수백만 명의 국민이 참여하면서 통일운동으로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광범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한총련의 주류는 이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 1998년에는 이러한 실천활동을 기반으로 이념적 색채를 달리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을 아우른 '민화협(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이 결성되었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은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율배반적이지만 자주와 통일의 민족적 가치가 주목받는 '민족주의 시대'도 함께 도래하고 있었다. 산업화, 민주화에 이어 근대화 프로젝트의 완결을 상징하는 민족국가 건설이 현안으로 부상한 시대적 조류에서 본다면, 90년대 극우반공전선의 '마녀사냥'을 견뎌낸 학생들의 통일운동은 일종의 선도투쟁으로 평가할 수 있다. 90년대 실질적인 민주화 프로젝트의 추진 과정에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학생운동의 위상과 활동 지분은 축소되었다. 하지만, 통일 프로젝트를 통해 그들은 반공주의·반북주의 도그마와 투쟁하면서 '선구자' 역할을 계속할 수 있었다.

2) 미완의 민주화 투쟁, 그리고 '신' 민주주의를 위한 모색  

1987년 6월 항쟁 직후 학생운동은 전도유망한 역사의 주역으로 추앙받았다.  

이제 학생운동은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80년 이후의 폐허에서 다시금 확고한 터전을 닦았을 뿐 아니라 6월 운동을 거치면서 대중투쟁의 탄탄한 주춧돌을 세웠던 것이다. 이제는 보다 넒은 시계가 열린 변혁운동의 밝은 전망 속에서 한층한층 쌓아 올려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그건 허망한 꿈이었다. 군정종식의 희망은 좌절되었고 민주화 투쟁은 계속되었다. 1988년 초유의 여소야대의 국회는 민주화 요구에 밀려 '광주학살과 5공비리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청문회가 과거청산에 실패하면서 학생들은 다시 '거리정치'에 나섰다. 1988년 10월 28일 발족한 '부정비리 주범 전두환 이순자 구속 및 광주학살 5적 처단을 위한 학생투쟁연합'은 '전두환 이순자 구속을 위한 궐기대회'를 개최하는 등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자 광주학살의 최고 책임자인 동시에 각종 5공비리의 핵심고리인 전두환의 처단을 요구했다. 마침내 국민적 압력에 굴복한 전두환은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고 백담사에 유배되었다. 이후에도 학생운동은 '광주학살 원흉의 처단과 5공청산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 12·12, 5·17쿠데타와 광주학살 관계자들을 법정에 세우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런데, 1989년 5월 3일 동의대에서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면서 7명의 전경이 화재로 숨지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악재는 거듭되었다. 그해 10월 24일에 연세대에서는 설인종군이 학원프락치로 오인받아 집단구타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태우정권은 이를 빌미로 학생운동에 대해 공세적이고 악의적인 언론공세를 펼쳤고 구속영장을 남발하며 탄압했다. 1990년 7월 6일 치안본부는 '화염병 사용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시행한 이후 대학생 1천 1명이 구속되었다고 발표했다. 대학생 시국사범이 1천명을 넘는 공안통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직선제를 통해 집권한 노태우정권에 의해 국가안전기획부와 공안검찰 등을 동원한 공안통치가 자행되자, 학생운동세력의 절망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1991년 '5월 투쟁'은 강경대 치사사건을 계기로 공안통치와 장기집권을 위한 3당 '야합'과 내각제 개헌 기도, 6공 최대의 권력형 비리인 수서사건과 페놀방류사건으로 대표되는 각종 비리와 실정에 대한 분노가 또다시 학생이 주도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 분출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치열함에서 5월 투쟁은 6월 항쟁에 비견될 만큼 격렬했다.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의 주도하에 민주화 투쟁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각계각층의 서명과 농성투쟁에 이어 5월 4일, 9일, 18일에 전국적으로 개최된 궐기대회에는 각각 20만, 50만, 40만으로 추정되는 시위군중이 참여했다. 시위 초기에는 '공안통치 종식과 내각 총사퇴, 백골단 전경 해체' 등의 구호가 등장했으나 점차 '악법 철폐, 억압적 국가기구 해체, 양심수 전면 석방' 등의 요구를 거쳐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로 결집되어갔다. 이 기간 중 강경대를 필두로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 폭력에 의한 타살만이 아니라 잇따른 자살 혹은 분신이 계속되던 그야말로 '분신정국'이었다.  
노태우 정권의 역공 또한 강경했다. 그들은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을 유발했고 외국어대 학생들이 국무총리 서리 정원식에게 밀가루 계란 세례를 한 해프닝을 스승모독의 반인륜적 사건으로 비화시켜 반전카드로 활용했다. 수구보수언론은 5월 투쟁을 '죽음을 무기로 한 체제전복세력의 반인륜적 행위이자 운동권 사이에 죽음을 찬미하는 소영웅주의적 허무주의적 분위기가 집단 감염되면서 확산된 병리현상'으로 몰아부쳤다. 시인 김지하는 '잇따른 자살과 분신에서 일본 전학련 몰락의 냄새가 난다'며 '학생들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는 궤변을 읊어 충격을 던졌다.
5월투쟁은 노동자를 비롯한 조직화된 대중이 참여하면서 제2의 6월 항쟁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반동적 공세에 밀려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투쟁 대오에 참여했던 학생운동가와 학생대중은 깊은 좌절과 회의에 빠졌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민중주의적 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또다시 국가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만 비정한 현실 앞에서 스스로를 책망하는 패배주의·청산주의·해체주의가 만연했다. 훗날 한총련조차 '5월 투쟁의 패배로 학생운동이 학생들의 가시권을 벗어나 고립되었고 학생들은 탈정치화, 보수화하여 학생회 사업에 대한 참여가 준 대신 개인적 이해에 맞는 소모임이 늘었다'고 평할 정도였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등장한 한총련은 학생대중과 함께 하는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혁신을 통해 학생운동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우선과제는 학내 민주화를 위한 학원자주화투쟁이었다. 90년대 후반 들어와 전체 인구에서 대학생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에 이어 한국이 세계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학교육은 대중화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80년대까지 대학은 출세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며 계층 상승의 확실한 도구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대학은 특권의 장소가 아니었으며 대학생은 특권계급이 아니었다. 이렇듯 대학의 수가 급격히 늘고 그 위상이 선민교육이 아닌 대중 교육의 장으로 변모하면서 대학은 거대화·세분화된 사회경제구조 속에서 사무직과 중간관리직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배출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학생들은 이러한 대학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변화에 기반해 대외적인 정치투쟁만이 아니라 학교운영을 민주화하고 부정·비리 재단으로부터 독립하여 교육기관으로서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학원자주화운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1997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의 최우선 당면과제로 꼽은 것은 학내민주화(60.5%)였다. 학원자주화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된 것은 1993년 무렵이었다. 주요 이슈로는 무능·어용 교수 퇴진, 학교 예결산 공개, 등록금 산정·교수 채용과정·총장 선출과정에의 학생 참여, 교수 학생 직원이 함께 참여하는 대학발전위원회 구성, 부정·비리 재단퇴진 등이 제기되었다. 학원자주화운동을 대표하는 것이 덕성여대의 대학민주화투쟁이다. 덕성여대의 대학민주화투쟁은 1990년 박원국 이사장의 횡포로 해직당한 성낙돈 교수 복직투쟁을 시작으로 1997년 한상권 교수 복직과 재단 퇴진 투쟁, 2001년의 재단 퇴진과 관선이사 파견 투쟁이 이어지면서 결국 박원국 이사장이 사퇴하고 관선이사가 파견되면서 정상화와 개혁의 길을 걷게 된 12년의 지난한 역사를 갖고 있다.
대학은 학생운동의 고유현장이고 학원자주화·대학민주화는 학생 자신의 문제이자 과제다. 그런데,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를 추구하던 한총련은 곧 학원자주화투쟁을 반정권투쟁의 대중동원기제로만 인식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기 대학문제를 풀고 우리 교육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정권타도투쟁에 나서야 한다'며 정치투쟁 우위 노선으로 회귀했다. 정권타도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학원자주화투쟁은 개량적 조치라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에서 학생운동은 저항의 선봉을 담당했지만 극단적 억압으로 80년대까지 학생운동의 '역사'는 사적인 연고를 통해 은밀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분파성을 극복하기 어려웠고 대중성과 실천성에서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총련은 이처럼 강제된 '우리 안의 파시즘'을 정면으로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가 극복되면서 절차적이고 실질적인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던 시변(時變)에도 적극대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폭력을 마다않는 정권퇴진투쟁을 되풀이하며 정치투쟁에 매몰되는 그야말로 전통을 고수하며 혁신을 두려워하는 보수적 태도를 취했다. 동성애운동·양심적병역거부 운동·학벌철폐운동·안티조선운동·장애인이동권쟁취운동·일상적 파시즘 극복 등 과거 민주화운동이 간과했던 차별과 적대, 특권 체제의 해체적 개혁을 위한 생활의 민주화·성찰적 민주화를 내용으로 하는 사회적 민주주의='신'민주주의에도 소극적이었다.
침체 일로의 학생운동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은 것은 학원자주화운동 일환으로 2000년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등록금투쟁이었다. IMF 이후 동결되었던 등록금의 갑작스런 인상에 항의하며 경희대가 8년 만에 학생총회를 성사시키는 기록을 남겼듯이 등록금 투쟁은 많은 대학에서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대학 내 투쟁을 활성화시켰다. 한총련 등의 학생운동조직과 시민·사회단체 등이 공조하여 등록금 인상반대와 국가 교육재정확보를 요구하는 연대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학생들 간에는 정치투쟁보다는 '포스트 민주화' 세대로서 '질서나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생활의 민주화, 성찰적 민주화=신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탈정치적인 '학내 정치', '생활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것은 문화·의식·일상을 강조하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학생운동과 학생문화를 요구했다. 이념을 표방하는 학회나 동아리는 위기에 처했고 학내 복지문제가 학생회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저항적 민중문화에 기반한 고유의 '대학문화'는 사라졌다. 대신에 합리적이고 공동체적인 대학문화가 아니라 록음악 혹은 펑크문화 등에 등장하는 청년 세대의 반항적 감성을 예찬하는 대중문화가 그 자리를 메웠다.
이러한 학생문화와 학생운동의 위기를 대안적 대학문화의 생성과 실천을 통해 돌파하고자 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파괴와 소비의 문화가 아닌 생성과 진보의 문화를 일구는 대학문화운동론을 제안했다. '문화'라는 코드에 대한 유별난 주목과 집착은 경제적 풍요에 따른 문화적 욕구의 분출이라는 사회적 조류의 반영인 동시에 실패한 민중주의·사회주의의 대안적 화두를 찾고자 하는 모색의 반영이었다. 규율·권력·폭력 등의 잣대를 준거로 기성의 대학사회 내 위계와 비민주성을 비판하고 '생성과 변이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연대'로서의 대학문화를 지향하는 이러한 흐름은 대안과 전망으로서의 노선이 모호하거나 불투명하다는 한계는 갖고 있었지만, 실천적으로는 민주주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신'민주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그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4. 만들어가는 미래 : 계승과 혁신을 통한 재기와 도약  

지금도 분단과 종속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민족 혹은 국가가 종속된 상황에서 각 개인의 바람직한 삶이 존립하기 어렵다. 그래서 자주화가 요구된다. 자주의 문제는 분단극복-통일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분단해소의 최종 귀결점은 통일이다. 자주와 통일을 추구하는 민족주의는 쇼비니즘적 궤적으로 인해 상당히 남용되고 오용되기는 했으나 종속과 분단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여전히 유효한 가치다. 이런 의미에서 90년대 학생들의 통일운동은 역사적인 선도투쟁이었다. 이는 국가 혹은 시민운동 영역에서 민족문제에 대해 여전히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또한 통일운동의 확고한 주체가 부재한 현실에서 민주화운동의 동력이자 '대행자'였던 학생운동이 또다시 통일운동의 '대행자'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지금 한총련은 강경파와 온건파가 각각 반미자주화투쟁노선과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 건설노선을 틀어쥐고 갈등하고 있다. 한총련 간부에 대한 사실상의 수배해제가 결정되면서 한총련 합법화가 쟁점으로 부상한 그 순간,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훈련 중인 경기도 포천군 미군 사격장에 진입해 장갑차 위에 올라 반미시위를 전개했다. 뒤질세라 수구언론과 우익은 한총련을 곧바로 '한미동맹을 위협하는 이적단체'로 몰아붙였다. 합법화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녹색연합, 민족문제연구소 등 30여개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 391명은 「한총련에 대한 비이성적 마녀사냥을 중단하라」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반도의 반전평화를 위한 전쟁훈련에 대한 맨몸 저항행위가 폭도로 몰리고 그들의 주장의 핵심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고려 없이 학생들에 대한 마녀사냥이 계속되고 미국의 입장발표에 따라 한국정부와 검찰이 학생들에게 초강경대응을 진행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결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이다.

한총련의 반미자주화운동에 대해 전에 없이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정서적 공감대는 2002년 자발적인 네티즌을 중심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전개된 '촛불시위'에서 발원한다. 이라크전쟁과 북핵문제로 인한 한반도 긴장 고조로 반전평화와 함께 자주화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점차 확대되는 가운데 한총련의 통일운동을 매개로 표면화되었던 남남갈등이 지금은 친미-반미주의를 화두로 첨예화되고 있다. 그 반미 민족전선의 선도에는 아직도 한총련으로 대표되는 학생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자주노선의 주체가 명확하게 꾸려지지 않는 상태에서 '대행자'로서의 그들의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학생운동은 민주화와 민족국가건설을 위한 근대화 프로젝트의 시민-민중적 주체 역량이 미진한 가운데, 그들의 역할을 대행한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한편, 지난 9월 7일 폐막한 한총련 임시 대의원대회는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 건설을 공식화했다. '시대와 역사가 학생운동에 부여한 임무를 자각하며 300만 학우들의 대표체, 정견과 사상의 장벽을 초월하는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 건설에 매진한다'는 것이다. NL계만이 아니라 PD계를 포함한 다른 노선의 학생조직까지 아우르는 기구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들의 구상이다. 또한 새로이 건설되는 학생운동 조직은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 황폐화된 대학에서 진보의 가치를 꽃피우며 300만 학우의 자주적 권리와 정치적 지향을 온전히 실현해 낼 것이며 민주통일 번영시대를 주도할 새 세대를 양성하는 요람으로써 학생운동 본연의 역할을 바로 세울 것'임을 천명했다. 민족주의적 요구만이 아니라 '신'민주주의적 시대 요구를 포용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진보'의 가치를 학생운동을 통해 구현하겠다는 그들의 포부는 상당히 전향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IMF 이후 청년실업이 대학생들을 옥죄면서 대학은 공동체의식이 사라진 경쟁문화의 장으로 변하고 있으며 학력주의·학벌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대학 간, 대학 내 위계질서도 점차 확연해지고 있다. '대학은 계급사회다'라는 자탄이 등장할 정도다. 대학의 공공성 확보를 위한 개혁과 투쟁의 요구가 대학사회 안팎에서 전에 없이 높다. 이것이 학생운동의 활로를 결정할 가장 중요한 키워드일 수도 있다. 학생운동마저 권력화·관료화·제도화·규율화 등의 부정적 이미지로 분식되면서 그 비민주성과 패권주의를 질타당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는 것 또한 위기 탈출과 정상화의 관건이다. 자주와 통일을 추구하는 20세기적 민족주의 '운동'과 학원자주화운동 및 진보적·대안적 대학문화를 건설하고자 하는 21세기적 '신'민주주의 운동을 겸비한 새로운 학생운동의 전범이 창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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