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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관료에 대한 노동해방주의자의 입장

현장연대 2002.11.23 11:07 조회 수 : 900 추천:31

노조 관료, 그리고 그들에 대항한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의 투쟁


1. 들어가며
  
  최근 수년 동안 선진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처럼 절실하게 제기된 화두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화두는 그 절박함이 나날이 더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다. 조금이라도 진지한 노동자 투사라면 누구든지 이 화두와 씨름하고 있으며, 이를 풀지 못하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통받고 있다. 이는 계급의식적인 선진 투사들이 노동대중과 긴밀하게 밀착하고 그들을 노동해방의 혁명적 길로 이끄는 데서 의지하는 '현재'의 거의 유일한 대중적 수단이 다름 아닌 노동조합운동이며, 따라서 이 운동의 쇠퇴가 그들의 실천에 거대한 난관을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렇지만 언뜻 보기에 대단히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푸는 데서 우리는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하기는커녕 우리 모두는 이 문제의 해결이 더욱 복잡해지고,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비통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그에 따라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이라는 화두는 일종의 '관성화되고 박제화된 문제의식' 정도로 추락하고 있으며, 혁신을 향한 선진 투사들의 발걸음 또한 체계적이고 자신에 찬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노동조합운동을 퇴행시키고, 그 역동적이고 대중적이며 전투적인 성격을 끊임없이 탈각시키는 노동조합 관료들의 사슬이 생각만큼 약하지 않으며, 또한 그 사슬을 끊어내는 작업이 단순히 '노동조합운동의 영역'에만 갇혀서는 결코 수행될 수 없음을 반영한다.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이라는 중차대한 과업은 '노동운동의 혁명적 조직화', 그리고 '개량주의에 맞선 혁명적 노동자 전위투사들의 조직적 결집' 없이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운동과 나란히 진군하는 '노동조합운동의 혁신' 흐름만이 체계적인 성과를 보장할 수 있는데, 그것은 '노동조합 관료'를 양성하는 근본 뿌리가 다름 아닌 '개량주의', 그리고 '혁명적 전망과 분리된 편협한 노동조합운동'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이라는 화두는 두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고 또한 반드시 그렇게 바라보아야 한다.
  한 측면에서, 그것은 '노동운동의 혁명적 조직화', 그리고 이것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혁명적 전위정당의 조직화'라는 지난한 과제의 해결을 요구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과업이다. 다른 한 측면에서, 그것은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이라는 과제에 공감하고 있으며 절실하게 고민하고 있는 다수의 선진 노동자 투사들에게 이 화두가 제기하는 실을 따라 '혁명운동의 문'으로 들어설 수 있는 대량의 수단을 제공한다.  
  이처럼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이라는 과업은 혁명운동의 조직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한편으로 대단히 어려운 과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단히 풍부하고 근본적인 성과를 보장할 수도 있다. 어떤 길이 실현되느냐는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이라는 과업을 '혁명운동의 조직화'라는 과업과 얼마나 밀착시킬 수 있느냐, 다시 말해 노동조합의 선진 투사들과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이 얼마나 긴밀히 융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 글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하고, 그로부터 실천적 결론을 끌어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2. 노조 관료의 근본 뿌리
  
  1) 자본주의 체제 하의 노동조합 투쟁
  
  자본의 착취에 대항해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단결할 필요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대두되는 조직이 '노동조합'이다. 이 노동조합은 만일 노동해방이라는 혁명적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주로 임금과 근로조건의 개선에만 주의를 집중한다. 그런데 임금과 근로조건의 개선을 위한 투쟁은 아직 자본주의 체제의 철폐를 뜻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해서 임금을 취득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투쟁에 불과하다. '노동력 판매자'(임금노예로서의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력 구매자'인 자본가로부터 "더 나은 가격"(더 높은 임금)을 받는 것, 또한 노동력(노동능력)이라는 자신의 상품이 자본가의 무한대의 이윤욕 때문에 고갈되어 상품가치를 잃게 되는 불행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노동력의 사용'을 적절한 궤도 내로 제한하는 것(노동조건 개선)이 바로 그것이다.
  이 경우,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무산자(임금노예)의 지위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노동조합 투쟁은 '임금법칙' -- 임금의 크기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본질적으로 귀착한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철의 법칙 -- 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임금법칙'이 자신을 관철하는 '하나의 통로'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만일 노동조합 투쟁이라도 없다면,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에서 특별히 유리한 지위에 서 있지 않다면) '노동력 재생산 비용'(소위 생활임금)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 노동조합으로 단결해 투쟁할 때만 그나마 제 값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 점은 아주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다. 아무리 노동조합이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노동자들은 자신이 수행한 노동의 '전체' 대가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시장에서 '표준 생계비'를 조사한 뒤, 이를 기준으로 '적정한 생활임금'을 달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것이 미조직 노동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미조직 노동자들은 단결력이 없으므로 '자본가가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생활임금'에 굴복하는 반면, 조직된 노동자들은 나름대로의 기준에 입각해 '적정한 생활임금'을 지급하라고 투쟁하여 일정 관철시켜낸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임금법칙'은 의연히 관철된다.
  이는 실업자들이 가하는 압력이 거대하고, 노동자들의 노동력 판매 조건이 불리해지는 공황기에 더욱 극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시기에는 아무리 잘 조직된 노동조합일지라도 대개 노동시장(방대한 실업자들)이 가하는 압력에 굴복해 지극히 낮은 임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 노동조합이 임금투쟁에 과감히 나서는 경우는 '노동력 판매 조건이 유리한 시점', 즉 호황기에 국한된다. 이처럼 통상적인 노동조합은 호황기와 불황기를 거치면서 때로는 유리한 조건에서 때로는 불리한 조건에서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임금노동자들의 처지를 반영할 뿐이며, 장기적으로 고찰할 때 노동조합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라는 임금법칙에 좌우된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 투쟁의 출발점으로서 노동조합 투쟁은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노동자들은 만일 단결해 저항하지 않는다면, '노동력 재생산 비용'(생계비용)조차 제대로 획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노동자들은 비록 그 경제적 결과들이 하찮고 일시적일지라도, 노동조합 투쟁을 통해 정신적, 도덕적으로 단련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일 노동자들이 그 직접적인 경제적 결과물이 하찮더라도 자본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지 않는다면, 심지어는 패배가 불가피할지라도 노동자의 자존심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계급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릴 것이다. 오직 투쟁하는 노동자들만이 투쟁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그의 몸 속에 심어준 모든 타락과 굴종, 이기주의 따위를 벗어 던지면서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있는 혁명 계급으로 당당히 설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분열되어 좌절하고 비겁하게 항복한다면 노동자들은 단결해 투쟁하는 법을 잊게 되며, 새로운 혁명 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한 단결해 투쟁하면서 저항할 줄 아는 노동자들만이 충분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으며, 그 결과 노동해방 혁명이라는 거대한 과업에 대한 확신을 키울 수 있다. 만일 현장에서 전개되는 게릴라전에서도 전진하지 못하고 분열된다면,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필사적으로 전개해야 승리할 수 있는 노동해방 혁명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셋째, 단순히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만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조합 투쟁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노동해방 사회를 건설하지 않는다면 모든 성과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일 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으로 단결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위협하고 극도로 불리한 조건으로 내모는 불가항력적 힘이 다름 아닌 임금노예제도 자체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따라서 단순히 임금투쟁만 전개해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임금투쟁과 같은 게릴라전만이 아니라 임금노예제도 자체를 철폐하는 '전면전'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불연 듯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혁명에 대해서는 단 일 분도 꿈꾸지 않았던 가장 평범한 노동자일지라도 동의하는 임금투쟁의 실을 따라 노동자들이 혁명의 교육을 받게 된다. 노동조합 투쟁이 가르치는 교훈을 충분히 진지하게 추적할 수 있는 노동자라면, 자연스럽게 임금투쟁과 같은 게릴라전만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으며 더 근본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만일 노동해방 혁명이 없다면 노동자들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지루한 공방전에 갇힐 수밖에 없으며, 오늘 거둔 제한된 성과들도 자본주의 체제의 반격에 의해 내일이면 곧 물거품이 되곤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이처럼 노동조합 투쟁은 광범위한 노동자들이 '노동해방 혁명'의 필요성을 배우고, 이 혁명을 위해 단결하는 법을 깨우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주체로 단련되어 가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의의가 있다.

  2) 노동자 혁명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하의 임금노예제도인가?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투쟁의 이와 같은 본질적 의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은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획득한 정도가 판이하게 다른, 서로 다른 수준의 노동자들이 혼재되어 있다. 계급의식은 노동자 모두가 꼭 같은 정도로 획득하지 않으며, 노동자들은 불균등하게 발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조합 투쟁을 두고서, 서로 다른 견해들이 노동자들 내부에서 나타나게 된다.
  후진적인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투쟁을 전적으로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의 영역에만 묶어두고자 한다. 당연히 이들은 임금노예 제도의 철폐를 위한 투쟁력을 단련시키는 대중적 수단으로 노동조합을 규정하는 선진적 노동자들과 대립한다. 이런 후진적 견해의 원천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많은 노동자들은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법칙에 근본적으로 좌우되며 임금노예제도 자체를 혁명적으로 철폐하지 않는 이상, 노동자들이 획득할 수 있는 성과는 아주 제한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자들을 자연발생적으로 서로 분열시키고 대립시킨다. '자본 사이의 경쟁'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임금노예제도를 철폐하지 않는다면, 자본 사이의 피 말리는 경쟁과 자본주의 무정부성은 노동자들을 휘감는다. 만일 어떤 회사가 경쟁에서 패배해 도산한다면, 자본가만이 아니라 거기에 고용된 노동자들까지 몰락한다. 노동자들은 대량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며, 심지어는 밀린 임금과 퇴직금까지 받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막고자 한다면, 두 가지 탈출구말고는 없다. 하나는 전체 노동자들이 총단결해 자본주의 경쟁체제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회사 살리기' 기조를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임금투쟁까지 극히 제한된 수준에 묶어두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노동자들은 회사 살리기라는 대전제 하에서 진행되는 개량적 수준의 투쟁을 넘지 못하게 된다. 그나마 회사가 안정적이고 막대한 이윤이 쌓이면, 다소간에 활발한 임금투쟁을 벌일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위기가 닥치면 회사 살리기를 위해 양보하고 심지어는 발벗고 나서는 노사협조주의가 번성한다. 이것은 보다 협소한 범위에서는 "부서별, 라인별, 공장별 물량유치 경쟁"으로, 보다 넓은 범위에서는 "자동차산업 안정화운동, 국가경쟁력 향상운동"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포로가 되며 자본주의 체제에 결박당하고 만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은 기업별로, 국가별로, 부서별로 서로 분열되어 경쟁하는 불행한 상황으로 추락하며, 그 결과 단사주의, 민족주의, 부서 이기주의 따위가 스며든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의식을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후진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과 같은 범위에만 묶어두려 하며, 나아가서 노동조합을 좁은 범위의 노동자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편협한 기구로 몰고 간다.  
  다음의 요인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후진적 노동자들은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단기적인 이익을 때로는 희생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지금 당장의 이익에만 집착한 나머지 '단결력과 조직력, 투쟁력'을 약화시켜 장기적으로는 그들의 이익을 훼손한다. 가령 장기 파업을 전개하는 경우, 노동자들은 약간의 임금 인상마저도 장기 파업에 따른 손실분에 의해 잠식당하고 만다. 하지만 이런 투쟁이 있어야만, 노동자들은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확고히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돈에만 관심을 갖는 후진적 노동자들은 이런 피해를 겁내면서, '단기적인 실리'에 집착한다. 그들은 단기적으로 많은 손실을 요구하는 결사적인 투쟁은 남는 것이 없으며, 노동조합 투쟁은 아주 온건한 궤도 내로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자본가계급이 가하는 거대한 압력이 덧붙여진다. '부분적 이익이 아닌 전체적 이익', 그리고 '단기적 이익이 아닌 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가들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힘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면 단기적이고 부분적인 손실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들은 당장 생산을 하지 못해 막대한 피해를 입더라도, 투쟁하는 노동조합을 제압함으로써 획득하는 장기적인 성과들을 위해 인내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노동조합의 투쟁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선두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구속시키며, 손해배상 등의 갖은 수단을 동원해 투쟁하는 조합원들에게 손실을 입힌다. 단기적으로 보자면, 맹렬히 투쟁하는 노동조합이 획득한 모든 이익들이 이와 같은 '투쟁 비용'에 의해 상쇄되거나 심지어는 그것을 상쇄하지도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후진적 노동자들 속에서는 '투쟁하는 노동조합'을 부정하고, 아주 온건한 정도의 노동조합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이 자라난다.
  게다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총자본의 개입이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전체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혁명적인 방향을 취하는 노동자 투쟁들을 압살하여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만일 이런 계급적이고도 결사적인 노동자 투쟁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살아 움직이면서 널리 퍼진다면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는 불가피하다.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파수꾼인 자본가 국가는 전체 자본가들의 의지를 대표하여, 그런 노동자 투쟁을 진압하여 본때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해고와 수배, 구속, 막대한 손해배상, 기숙사와 사원아파트와 같은 거주지에서의 추방 등이 이런 모범적인 노동자 투쟁 부대를 덮친다.
  이런 정도의 본때는 약간의 타협도 강제할 수 없을 만큼 패배한 노동자들이 그 이후에 겪어야 하는 고통에 비하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블랙리스트'가 적용되어, 웬만한 사업장에는 아예 취업 자체가 봉쇄되어 버린다. 투쟁했던 노동조합에 속해 있었다는 점이 증명만 되더라도, 그 어떤 자본가도 고용하기를 거부한다. 임금노동자의 단 하나의 생존 수단인 '고용될 권리'조차 박탈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이리저리 떠돌다가, 대부분 가장 열악한 조건의 사업장에 취업하게 되거나 아니면 상시적 실업자로 추락하고 만다.    
  이처럼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 체제는 무자비한 '보복'을 자행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고 아무리 많은 피해를 감수할지라도, 이런 '혁명의 싹'들을 짓밟고 여타 노동자들에게 본때를 보이는 데 필요하다면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단지 한 명의 사장만이 아니라 전체 자본가계급의 운명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계급적 대의를 내건 결사적이고 헌신적인 투쟁이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경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면, 일부 연약한 노동자들 속에서는 "투쟁해봐야 얻은 것이 뭐가 있느냐? 괜히 우리만 손해보고, 임금과 근로조건은 거의 개선되지 못했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자라난다.  
  그것이 무엇에서 비롯되었건, 이와 같은 굴종적이고 패배적이며 근시안적인 후진성들이 "노동조합"의 길을 개량적이고 타협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는 토대를 이룬다. 이 모든 것들이 결론적으로 귀착하는 것은 노동조합은 계급적이고 혁명적인 길을 버리고, 임금과 근로조건의 단기적 개선이라는 개량적 처방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노동해방 혁명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고 확신하며, 노동조합을 그러한 혁명으로 나아가는 대중적 수단으로 간주하는 혁명적 투사들만이 그와 같은 추락에 맞서면서 올곧게 투쟁을 대표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노동조합을 단순히 단기적인 임금과 근로조건의 개선에만 묶어두려 하며, 노동해방 혁명을 향해 전진하지 않으려는 노동조합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후진적 견해들에 굴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노동조합 관료"의 근본 뿌리다.
  아무리 전투적일망정, 노동조합운동의 목표와 임무를 단순히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그것도 자신이 직접적으로 대표하는 좁은 범위의 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된 개선에 맞추는 노동조합주의자들은 자석에 빨려 들어가는 쇳가루처럼 자연발생적으로 "관료"로 전화한다. 비록 그 전투성의 정도에 따라, 빨려 들어가는 속도는 다를지라도, 그들은 차례차례 대중적 투쟁을 회피하고, 노동조합을 온건한 궤도 내로 제한하는 타협적 관료로 전락해간다. 자본주의 체제의 혁명적 타도를 부정하고, 또한 이를 위한 대중적 수단으로 노동조합을 간주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모두 "해당 조합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온건한 수준의 조합주의 활동'에 몰두하게 되기 때문이다.
  몇 번의 투쟁 과정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거대한 사슬들을 목격하며, 그리고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이익을 위해 계급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조합에 가해지는 엄청난 탄압과 공격에 기가 질린 그들은 후진적 조합원들의 의사에 굴종하여, 자연스럽게 '결사적인 투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들은 '강건한 파업투쟁'은 힘의 낭비이거나 실속 없는 명분에 불과하다고 믿기 시작하며, 가능하면 파업투쟁을 피하고 교섭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긴다. 간헐적으로 파업을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조합 상층의 교섭기구들의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한 압력판 정도로만 제한된다. 또한 노동자 혁명을 포기한 그들은 "조합원들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자판기 노조'를 세우는 데 골몰한다. '조합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해주는 것'이 자신의 본연의 임무라고 확신하며, 이에 따라 철저히 '단기적이고 실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사물에 접근하는 그들은 "조합원들에게 희생과 손실을 가져다줄 것이다"면서 결사적인 투쟁을 회피한다. 이들은 그 논리적 필연성을 따라 '조합원들을 대신하여 소수 간부들이 성과를 따내주면' 그것이 노동조합 간부의 역할을 가장 잘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혁명을 지향하는 투사들에게는 노동조합 투쟁을 통해 다수 대중들의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로 그들을 우뚝 세워내며, 온갖 희생과 단기적 손실을 감수하는 맹렬한 전투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적대성을 강화하고 노동자의 세계관을 체득하는 것이 목표이기에 '당장의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 '조합원들 스스로의 대중적 투쟁'이다. 칼 리프크네히트의 말처럼 "노동해방주의란 단순한 금전 문제의 문제가 아니라,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금노예제도에 결박당한 나머지, 노동조합의 본연의 임무란 '조합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해주는 것'이라고 믿는 개량주의 노조 관료들은 '투쟁을 장기화시키고 조합원들에게 헌신과 결단, 희생을 요구하는 대중적 투쟁'이란 노동조합의 본연의 임무에서 왕창 벗어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에게 문제는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노동자의 세계관이 아니라 단순한 금전 문제다.
  그 결과 우리가 통상 관료라 부르는 그런 속성들이 그들 속에서 퍼져간다. 우선 그들은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의해서만 겨우겨우 투쟁을 조직할 뿐 스스로는 결코 능동적으로 투쟁을 조직하지 않는다. 파업 투쟁의 단호한 조직화라는 기본적 원칙은 '투쟁을 위한 투쟁, 파업을 위한 파업'이라고 부정되면서, "우리는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을 때만 파업 투쟁을 전개할 뿐이다. 노동조합은 파업 투쟁의 기구가 아니라 조합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압력 수단이다. 파업 투쟁은 오로지 압력 수단으로만 배치된다"는 견해가 확고히 자리잡는다.
  이는 노동조합 질서와 체계에 거대한 각인을 찍는다. 노동조합은 조합원 대중의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투쟁 기구로서가 아니라 "조합원들을 대리"하는 특별화된 교섭 기구들로 변질해가고 조합원들은 이 교섭 기구의 안정성을 위해 때때로 힘을 실어주는 지극히 부차적인 지위로 밀려난다. 대중적 투쟁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노동조합 투쟁 기구들, 가령 평조합원들의 투쟁선봉대, 라인별 부서별 공동투쟁위원회 등등은 평가 절하되며, 노동조합의 교섭 기구들에 종속되도록 강요된다. 노동조합 간부들은 대중투쟁의 조직자로서가 아니라 '사측과 교섭하는 전문가'로 전화된다.
  나아가서 '자판기 노동조합'이 점차 자리잡는다. 조합원 대중들은 헌신과 희생, 각고의 노력을 동반하는 결사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해방 혁명의 주체로 성장하는 역동적 존재로 간주되는 대신, 노동조합 간부들이 '대리'하는 교섭을 통해 보호되고 또한 떠 먹여주어야 할 아이와도 같은 존재로 간주된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조합원들이 일시적인 어려움과 손실에도 불구하고 투쟁에 참가함으로써 노동해방의 주체로 성장하는가'의 관점에서 노동조합 활동의 성과를 계산하는 대신, '조합원들의 아무런 희생도 없이 얼마나 실리적 성과를 따내주었는가'의 척도로 노동조합 활동의 성과를 계산한다.
  이제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조합원들은 "죽을 떠 먹여주어야 하는 피동적 존재"로 자리잡는다. 반면 자신들은 우둔하고 단지 간부들이 무엇을 따내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인 조합원들을 대신해 투쟁하고 헌신하는 "선택 당한 소수"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이런 정서가 노동조합에서 질서화되고 고착되면, 조합원들은 수동화된다. 그들은 단지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무엇무엇을 따내 주라'고 요청하면서 그것이 획득되면 고마워하고 그것이 획득되지 못하면 '선택받은 소수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존재로 전락하거나 그렇게 전락하도록 강요받는다. 이제 소수의 선택받은 간부들과 다수의 수동적인 평조합원들 사이에서는 거대한 골이 형성된다. 조합원들은 간부들에게 굽실거리고 '부탁'하는 데 길들여지고, 간부들은 선택받은 소수로서의 사명감과 우월감을 가진 관료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더욱 고착화되면, 이제 간부들은 조합원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바라기만 하고 떼쓰는 아이들"처럼 간주하게 된다. 조합원들의 불만과 저항에 대해서도 분노하기에 이르며, '당신들이 뭐라고 해도 노동조합을 이끄는 힘은 전적으로 우리 간부들에게만 있다'고 조소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조합원들과 간부들 사이에 거대한 분리가 일어나며, 한편으로는 조합원들의 무기력성과 피동화가, 다른 한편으로는 간부들의 엘리트 의식과 관료주의가 자라난다. 양자는 노동조합의 하층(평조합원)과 상층(간부)에서 서로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노동조합 관료제"의 두 요소다. 노동해방 혁명을 포기하고, 단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임금과 근로조건의 사소한 개선에만 자신의 활동을 제한하는 개량적 노동조합주의라는 하나의 신체에서 자라나서, 노동조합의 상층과 하층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머리가 "노동조합 관료"와 "수동화되고 무기력화된 조합원 대중"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량적 노동조합주의를 극복하고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재조직화하지 않는다면, "노동조합 관료"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은 결코 싹둑 잘릴 수 없다. 이런 근본적 해결책이 추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성장하는 노동조합 관료라는 괴물을 목격하게 될 것이며, 남한 민주노조운동은 더욱더 후퇴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남한에서 이제껏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또한 혁명의 길로부터 이탈한 모든 노동조합운동이 그야말로 하나의 예외도 없이 자생적으로 도달하게 된 종착역이다.
  노동운동의 혁명적 조직화 없이, 그리고 그것과 분리시켜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을 말하는 자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거나 최소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노동조합운동의 관료화와 퇴행의 문제가 등장한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이 공히 보여준 결론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3. 노조 관료의 양상

  1) 호황기와 공황기, 그리고 일상 시기와 혁명 시기의 노조 관료
  
  노조 관료의 본질적 성격은 단일하지만, 그것이 노조 관료가 모든 시기에 판에 박힌 듯이 똑같이 행동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노조 관료는 '자본의 운동에 종속되는 임금의 운동'을 반영해 일정하게 탄력적으로 움직인다. 우선 호황기와 공황기에 나타나는 노조 관료의 모습을 살펴보자.
  상품 판매자로서의 지위에서 노동자들이 자신감을 갖는 시기는 호황기다. 완전 고용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는 호황기에 노동자들은 실업의 압력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팔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대개의 기업들이 충분한 이윤을 산출하고 있으므로, 노사협조주의자들까지도 '회사의 경쟁력 저하'에 대한 우려로부터 훨씬 자유로운 상태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한다.
  이 시기에, 노동조합 관료들은 일정 수준에서는 투쟁에 나서게 된다. 이는 노동조합 관료들의 주된 역할이 다름 아니라 "임금노예제 하의 노동력 상품의 거래 상인"이라는 점에 비춰본다면 아주 자연스럽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흘러 넘칠 때' 상인들이 자신감을 갖고 배짱을 부리듯이, 호황기에 노조 관료들은 노동시장에서의 유리함을 바탕으로 '임금 인상 투쟁'에 조금은 과감하게 나선다. 물론 노조 관료들 내에 차이는 있다. 노조 관료들 중 오른쪽에 있는 자들은 이런 시기에서조차 임금 투쟁을 아주 제한된 수위에 묶어두려 한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투쟁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이며, 또한 호황기에조차 '기업의 도산 위기'라는 공황기의 실업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하면서 노심초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통상 전투적 조합주의자로 지칭되는 부류들, 즉 노조 관료들 중 왼쪽에 있는 자들은 호황기에는 조금은 과감하게 임금 투쟁에 나서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실업의 망령이 당장 눈앞에 등장하지 않는 이 시기에는 임금 투쟁에서 일정 전투적일 수 있다. 그들은 상당한 수준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때때로 '성과금 배분'과 같은 단물을 함께 나누자고 자본에게 요구한다. 물론 이것은 혁명적 관점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노동력 판매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에 있는 시기의 임금 노예의 상태를 반영할 뿐이다. 그들은 '임금노예제도의 혁명적 철폐'라는 혁명적 관점에서 호황기 투쟁에 임하지 않으며, 거의 전적으로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이라는 편협한 테두리 내에 노동조합 투쟁을 묶어둘 따름이다.
  이처럼 혁명이라는 근본적 관점에서 볼 때 호황기에조차 좌익 노조 관료와 우익 노조 관료들 사이에서는 질적 차이는 나타나지 않지만, "노동조합주의 투쟁"이라는 측면에서는 양자 사이에 일정한 차이가 나타난다. 소위 우익 노조 관료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자 사이의 구분이 나타나는 시점은 거의 전적으로 이 시기에 '국한'된다.
  그렇다면 이 호황기의 노동조합 투쟁이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기에는 노사협조주의에 갇힌 아주 후진적 노동자층조차 일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임금 투쟁에 나서려 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한편으로는 노동시장에서의 유리함을 바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떡고물을 제공할 수 있는 자본의 호황 상태를 반영해서 일정한 경제적 성과를 쟁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 투쟁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노동대중이 단결과 투쟁을 배우며, 자신감을 키워나갈 수 있다.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한다.
  이 시기에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의 전술은 좌익 노조 관료들과 우익 노조 관료들을 분리시키고, 때때로 좌익 노조 관료들까지 활용해서 대중적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호황기 투쟁에서조차 좌익 노조 관료들은 투쟁을 전면화 시키지 않으며, 끊임없이 아래로부터의 강한 대중적 압력을 조직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호황기에조차 본연의 교섭 업무에 충실하면서, 자그마한 투쟁조차 없이 약간의 성과를 얻는 데 머물려고 하는 우익 노조 관료들과 달리 좌익 노조 관료들은 조합원들의 임금 상승에 대한 열망과 압력,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정한 투쟁을 조직하려 한다. 이처럼 좌익 노조 관료들이 조금이라도 투쟁하려 하는 한,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은 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활용하면서 능동적으로 대중적 투쟁 공간을 열어 젖혀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동조합주의 차원의 일정한 차이조차 공황기에는 대부분 소멸한다. 회사가 부도가 나거나 공황이 광범위하게 퍼지면, 실업자들이 가하는 거대한 압력을 노동자들은 받게 된다. 또한 이 때에는 자본 또한 이윤은 고사하고 생존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에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서 열 배 이상 철저해진다. 이런 시기에는 단순히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제한된 시도만으로는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을 돌파할 수 없다. 만일 임금노예제도를 박살내려는 혁명적 방향으로 전진하지 않는다면, 노동시장에서의 지극히 불리한 상황과 자본주의 체제의 거대한 압력을 반영해 투쟁은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만다. 임금과 근로조건의 개선은 고사하고, 단순히 고용을 보장받는 데서도 엄청나게 강한 결단으로 투쟁해야만 한다.
  당연히 소심한 개량적 처방전에 의지하는 노동조합 관료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이 시기에 제대로 투쟁할 수 없다. 아예 노골적인 노조 관료들은 노사협조주의적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며, 좌익 노조 관료들조차도 '고용과 임금, 근로조건을 맞바꾸는 양보교섭'에 집착한다. 만일 회사가 부도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면, 좌익 노조 관료들 또한 기본적으로 '회사 살리기'와 같은 노사협조주의의 끈끈이에 깊숙이 빠져든다. 이런 시기에는 좌익 노조 관료냐 우익 노조 관료냐 하는 구분법은 거의 무용하며, 그들은 고용이라는 이름 하에 '회사 살리기'와 같은 노사협조주의에 항복하고 만다.
  이 시기에는 기본적으로 좌우를 막론하고 노동조합 관료들, 즉 개량주의 노조 지도자들의 모든 처방전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자본주의 체제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혁명적이고 계급적이며 정치적인 투쟁만이 노동자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노예제도의 틀을 인정하는 이상, 그리고 그것을 과감히 뛰어넘으려 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선한 의도일지라도 그것은 객관적으로 무용하거나 아니면 노사협조주의로 귀착되고 만다. 좌우를 막론하고, 노조 관료들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켜줄 수 없으며, 그들이 늘상 말하는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마저도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는 좌우를 막론한 노조 관료들 모두와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면서 혁명의 기치를 제기하는 것이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의 전술이 된다. 물론 혁명의 기치를 제기하는 과업은 호황기와 공황기를 막론하고 항상적인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의 임무이지만, 이 시기에는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 근로조건 문제'가 손을 뻗치면 바로 닿을 듯 혁명과 가까이 있으며, 또한 그렇게 혁명적으로 투쟁하지 않는 이상 사소한 방어조차도 이뤄낼 수 없기에 혁명의 기치는 더욱 사활적이다. 반면 혁명을 추구하지 않는 개량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좌우를 막론하고,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를 조금도 대변할 수 없다.  
  따라서 만일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의 능동적인 준비가 충분하다면, 바로 이 시기에 이들은 무기력한 노조 관료들을 젖히면서 대중적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 그것은 주객관적으로 혁명이 임박한 시기이건, 아니면 아직 주체적 조건이 충분하지 않아서 단지 혁명적인 객관적 위기만이 존재하는 시기이건 관계없이 공황기의 전면적인 투쟁이 노동대중들을 혁명의 문으로 인도하는 데서 위력적인 무기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황기에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은 '즉각적인 실현가능성 유무'와 무관하게 대중적 투쟁을 고취하고 조직하며 전력을 다해 이끄는 반면, 개량적 노조 관료들은 '자본주의 하에서 실현불가능성' 혹은 '노동조합은 임금과 근로조건과 같은 순전히 즉각적인 경제적 요구에만 자신을 국한해야 한다'는 이유로 과감한 투쟁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나은 좌익 노조 관료들은 공황기에도 때로는 일시적일 망정 '고용보장'을 내건 투쟁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적 수준으로까지 노동조합 투쟁을 끌어올릴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공황기에 열 배 이상 폭력적이고 전면적으로 덤벼드는 자본주의 체제와 정면으로 대결하기를 겁낸다. 그 결과 그들은 고용과 임금을 단체협약, 근로조건과 맞바꾸는 양보 교섭에 매달리거나 희망퇴직 따위의 은폐된 정리해고에 길을 터 주기 마련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식의 양보는 체제의 전반적 위기 국면에서 생존을 위해 엄청나게 포악해지는 자본가계급에게 더 강력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리하여 그들이 희망했던 고용보장조차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99%가 된다. 중도주의를 비롯한 개량주의의 실체가 남김없이 폭로되고, 혁명적 대안이 갖는 설득력이 현실에서 유감 없이 증명되는 시점이 바로 그 시점이다.
  하지만 공황기라고 해도 자동적으로 혁명적 투쟁이 상승 곡선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만일 혁명적 대안을 제기하는 혁명 대오가 너무나 힘이 약한 반면 개량주의자들이 압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노동대중은 침묵하거나 굴종하게 되며, 노동조합주의에 오히려 깊숙이 포섭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가 더 이상 이윤 증식에 기여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고, 그나마 고용된 노동자들에게도 '과도 노동'과 '개악된 임금 및 노동조건'을 강요하는 위기 국면에서 노동자계급에게는 혁명말고는 탈출구가 없다. 최소한 혁명적 투쟁을 조직하지 않고서는 절박한 생존권을 조금이라도 보호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오로지 혁명적 투쟁만이 체제 붕괴의 위협을 자본가계급에게 상기시켜주고,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공격의 고삐를 늦추도록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직 그 힘이 미약하더라도 오직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세력만이 대안임을 공황기 노동자 투쟁은 생생히 증명한다.
  그렇기에 그 힘이 대단히 미약해, 대중적으로 아직 충분한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을지라도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은 공황기에 정면으로 혁명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제기해야 하며,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과감한 행동과 투쟁,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해서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나란히 개량주의 노조 관료들의 무기력성과 형편없는 소심함을 정면으로 폭로해야 한다.

  2)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노골적인 노조 관료로의 전화

  한번도 회사 도산 위험이나 공황의 압력에 직면해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좌익 노조 관료들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약간은 활력 있게 투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겪은 뒤에는 상황은 달라진다.
  회사 부도와 공황기에 자본주의 체제의 거대한 압력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혁명의 길을 추구하지 않는 그들은 그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결론으로 '회사의 번성'이 '임금과 노동조건의 일정한 안정성'의 뿌리를 구성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그들은 바로 그 시기에는 자신들 노조 관료들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며, 노동조합 상층 기구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점을 직감한다. 때문에 그들은 한번 호된 채찍을 맞고 길들여진 말처럼 '온순'해진다. 그들은 우익 노조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회사 살리기' 기조를 노골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좌익 현장조직 출신 집행부들이 내거는 '자동차 산업 안정화 요구', '안정적인 물량 유치 요구', '회사 발전 프로그램 제기 요구'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나란히 이들은 호황기에조차 과감한 투쟁을 꺼리게 되며, 자본의 이윤 중 일부를 특별 성과금으로 받는 대신 생산에 협조하는 식의 제한된 투쟁 기조에 갇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좌파 노조 관료들은 점차 우익 노조 관료들을 뒤따르게 되며, 그들 사이의 차이는 지속적으로 좁아진다. 자본주의 체제가 오래되었고, 이에 따라 노동조합운동도 오래된 곳일수록 좌파 노조 관료와 우파 노조 관료를 구분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과거의 좌파 관료들은 길들어져서 우파 노조 관료의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되었기 때문이다.
  '우향 우'로의 전환, 그리고 우익 노조 관료와의 밀착 경향은 노조가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에 있을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생산 사슬에서 차지하는 결정적인 지위를 바탕으로 독점 대기업 노동자들 중 일부는 '임금과 근로조건, 특히 고용의 영역'에서 일정한 안정성을 누릴 수 있다. 이들은 그것이 노동시장에서 아직 남아 있는 특권(이것은 숙련 기술이나 지식 등의 제반 요인으로부터 비롯된다)의 결과이든, 그들이 생산을 멈출 때 전체 자본주의 체제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의 결과이든, 아니면 독점 자본이 획득하는 초과 이윤으로부터 비롯되는 빵 부스러기가 미친 영향력의 결과이든 상대적으로 훨씬 나은 조건에 놓여 있을 수 있다. 이는 곧장 그들의 노동조합에 상대적 안정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이 상대적 안정성과 거대한 위력을 노동해방 혁명의 힘으로 조직하고 계급의 구심으로 우뚝 세워내는 대신 개량주의 처방전을 따라 '자신들만의 상대적 안정성을 보호'하는 데 집착한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공황기에 자신들까지 위협하는 넘실거리는 공격의 화살을 맞아본 뒤라면 그러한 퇴행은 더욱 빨라진다. 이들은 노동조합주의적 견해에 입각해, 공황기에조차 상대적 안정성이 위협받지 않는 견고한 토대를 구축하려 애쓰게 된다. 게다가 공황기에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본모습을 드러내는 노동조합 상층 기구를 대중적 압력으로부터 보호할 필요성이 덧붙여진다.
  그 수단의 대표적 예로 '비정규직 제도의 확산을 받아들이고, 불황과 공황기에 비정규직들이 대신 짤리는 것을 전제로 체결된 정규직 고용안정 협약서'를 들 수 있다. 이런 협약이 준수될 수 없을 만큼 자본주의 체제가 극도의 위기 국면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면, 대략 30% 정도의 '비정규직 쿠션'들은 정규직들의 고용을 보장하기에 상당히 충분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상 시기에 극도의 저임금을 받고, 강도 높고 위험하며 더러운 작업에 종사하는 대가로 그들은 이른바 '회사의 번성'의 초석을 놓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불황과 공황기에 대량으로 해고되는 대가로 그들은 일자리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고용안정을 이룰 수 있게 된다.
  혁명적인 단결로 자신과 전체 노동자들을 함께 해방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그 대신 자본주의 체제 하의 임금노예제도를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절대 그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러한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좌익 노조 관료들은 점차 최소한의 계급적 대의조차 내팽개치거나 단지 말로만 승인할 뿐 행동으로는 그런 배신을 묵인하게 된다. 그런데 동료 노동자들에게 온갖 고통을 전가하면서 오직 자신들만의 임금과 근로조건, 고용에만 탐닉하는 그런 노동조합이라면 그 지도자가 좌익 관료건 우익 관료건 객관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결국 우리는 다음의 결론에 도달한다. '노동자의 힘' 따위의 좌익 노조 관료들의 생강 단체(이들은 좌익 노조 관료들에 영합하고 단지 그들을 비판하고 지지하며 압력을 가하는 것에만 자신의 역할을 제한한다)가 아니라 혁명 조직이라면 전투적 조합주의에 굴종해서는 안 된다. 그것과 선명하게 자신을 구분 짓고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좌익 노조 관료들의 치명적 한계를 꿰뚫어보아야 하며, 그들이 일시적으로 보이는 전투성조차도 점차 희미해지면서 통상적인 개량주의 노조 관료의 수준으로 퇴행할 것임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 점에서 굳이 외국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자들의 역사적 퇴화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남한 노동조합주의자들의 역사적 행보는 의미심장하다. 단병호, 문성현, 배일도를 비롯한 과거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자들이 지금 시기에 보여주는 기회주의로의 노골적인 이탈, 그리고 관료주의의 심화는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중력의 법칙처럼 필연적인 노동조합주의자들의 퇴화 법칙이다. 그들의 뒤를 따라 한 때는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을 외쳤지만, 결코 혁명의 관점에 행동으로 서지 않았던 전투적 조합주의 지도자들이 동일한 길을 가고 있다. 이상욱, 하상수, 조돈희, 이갑용과 같은 좌익 노조 관료들, 그리고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끊임없이 퇴행하고 있는 현장조직들, 마지막으로 이들의 퇴행과 함께 지속적으로 혁명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으로 포장된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유포하고 좌파 노조 관료들과 밀착하고 있는 '노동자의 힘' 등은 단병호와 문성현이, 국민파 현장조직들이, 민주노동당이 가고 있는 길을 수줍은 듯이 그러나 확고하게 뒤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자들의 필연적인 퇴화에 가슴아파할 이유도, 그럴 여유도 없다. 또한 좌익 노동조합 관료들의 일시적 행보에 일희일비하고, 때로는 그들의 약간의 투쟁 제스처에 마취되어 그들에게 환상을 갖고, 때로는 그들의 배신에 기습당해 땅을 치며 후회하며 분노하는 일 따위는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지도자들의 본질에 대해 조금도 환상을 갖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일시적인 행보와 단순한 말까지도 이용해 대중 투쟁의 기폭제로 활용하고, 심지어는 그들과 우익 노동조합 관료들 사이의 제한된 갈등까지도 활용하면서도 제 때에 적확하게 그들을 폭로하고 개량주의로 제대로 낙인찍는 것이다.
  만일 혁명적 노동해방주의가 남한 노동조합운동을 깊숙이 파고들고, 이 운동이 배출한 가장 전투적인 지도자들에게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의 빛을 쏘이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저주받을 노동조합주의의 망령을 확 걷어내고 혁명의 길로 노동조합운동을 이끌지 않는다면, 그런 일들은 어제와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 또한 계속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지속적인 퇴행에 '정지'를 고하고자 한다면, 진지한 노동자 투사들이 나아가야 할 길은 단 하나이다. '남한 노동운동의 혁명적 재조직화', 바로 그것이다.

  4. 노조 관료와 평조합원 투쟁
  
  1) 개량주의 노동조합 질서, 그리고 노조 관료와 평조합원 사이의 대립
  
  노조 상층에서 두텁게 형성되는 관료제가 평조합원들의 수동성, 무기력성과 나란히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평조합원들의 능동성, 적극성, 자주성과 노동조합 상층의 관료제는 함께 존재할 수 없으며, 일시적으로 공존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조그마한 기회만 제공되더라도 순식간에 박살날 것이다. 또한 평조합원들의 다수에 퍼져있는 '조합주의적 후진성'이 없다면, 노조 관료의 등장과 이들의 영향력 강화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노조 관료는 단지 노조 상층에 자라나는 개량주의 독버섯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평조합원들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후진적인 정서와 의식'도 반영한다. 노동조합원들의 조합주의적 편견과 후진성이 노조 상층이라는 거울에 일그러져 반영된 것, 바로 그것이 노조 관료제이다.
  때문에 평조합원들과 노조 관료 사이의 '대립'이라는 주장은 언뜻 보기에 전혀 타당하지 않으며, 논리적으로 서로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조 상층의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처해 있는 환경과 평조합원들이 처해 있는 환경은 상당히 다르며, 이에 따라 평조합원들이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계급적 직관을 발전시키기 시작할 때는 이에 비해 훨씬 더 관성적이고 훨씬 더 보수적인 개량주의 노조 관료 기구와 평조합원들 사이의 충돌이 발생한다. 이러한 대립을 제 때에 포착하고, 아래로부터의 평조합원들의 힘을 바탕으로 보수화되어 있고 관성화된 노동조합 관료기구, 다시 말해 평조합원들이 과거에 간직했지만 이제는 버리기 시작하는 낡고 보수적이며 후진적인 의식을 여전히 붙잡고 반영하려 하는 노동조합 관료기구를 허물고, 평조합원들의 각성된 계급의식과 성장한 투쟁의식을 올곧게 반영하는 새로운 노동조합 기구를 조직하는 것은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의 의무이다.

  이와는 반대로, 평조합원들의 수동성과 무기력성을 반영하고 또한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면서 등장하고 고착화되는 것이 관료적 노동조합 기구들이다. 이 기구는 '투쟁기구를 대신하는 교섭기구', '평조합원들의 자주적이고 능동적 기구들을 대신하는 간부들만의 편협한 기구', '조합원들이 주체로서 당당히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자주적 활동을 소수 간부들이 대행하면서 사소한 성과를 던져주는 자판기 기구', '연대에 소심하고, 정치투쟁과 만리장성을 쌓는 편협한 조합주의적 기구'를 특징으로 한다. 투쟁이 소강상태에 있고, 약간의 개량에 평조합원들이 마취되어 있으며, 일시적 패배에 좌절하여 무기력한 패배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을 반영하는 이 관료적 기구들은 그런 상황이 지속된 시기에 비례해서 더욱 두터워지고, 일종의 물질적 힘과 질서로까지 성장한다. 평조합원들이 잠들어 있거나 그럭저럭 그런 상황을 참을만하다고 느낄 때는 그런 관료적 기구들과 그 기구들이 촘촘하게 발전시키는 질서들은 아직 근본적으로 위협받지 않는다.
  하지만 평화와 침묵, 패배주의의 나날들은 언젠가는 전투와 강렬한 외침, 승리를 거머쥐고자 맹렬히 돌진하는 나날들로 바뀌기 마련이다. 긴 잠에서 불현듯 깨어나기 시작하는 평조합원들은 과거의 자신의 행적을 언제 그랬냐는 듯 비웃으면서 투쟁에 떨쳐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과거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관료적 질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마치 관성의 법칙처럼 고집스럽게 자신을 존속시키려 하며, 과거의 터무니없는 패턴과 방식, 질서를 고집한다.
  게다가 노동조합 관료기구의 무미건조한 사무적이고 교섭주의적인 질서에 길들여져 왔고, 빠르게 변화하는 현장의 공기를 접하지 못한 채 단지 자본의 행보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타성에 젖어있는 노동조합 관료들이 이런 변화를 따라잡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그들은 이와 같은 평조합원들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며, 그것을 기존의 평화로운 시기에 조응한 노동조합 기구들의 통제 하에 묶어두려 하게 된다. 또한 그들은 첨예하게 성장하고 있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과거처럼 자본과 평조합원들 사이의 '중개인'으로 행동하려 한다.
  그 결과, 평조합원들이 계급적 투쟁 본능을 되살리며 투쟁의 전면에 등장하려 하는 바로 그 순간, 기존의 노동조합 상층 기구들은 이를 가로막는 보수적 관료기구로 본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양자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여기서는 어느 하나는 분쇄되어야 한다. 새롭게 떠오르는 평조합원들의 계급적 투쟁 흐름이 제압당하고 기존의 관료적 질서에 순응하는 수동적 존재로 되돌아가든지 아니면 '교섭과 타협, 투쟁회피, 조합주의'의 두터운 사슬과 질서에 잠식당한 낡은 관료적 기구들이 제거되고 '단호한 투쟁과 대중성'에 입각한 새로운 노동조합 질서가 창조되어야 한다.
  바로 이 때 평조합원들의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관료적 기구에 의해 질식당하지 않고 전진하도록 고무하며, 그 걸림돌인 노동조합 관료 기구를 분쇄하는 선두에 서는 사람들이 바로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이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다.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은 비록 평조합원들의 투쟁력이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에도 끈기 있는 활동으로 지속적으로 평조합원들의 의식을 발전시키고, 그들의 자주성과 투쟁성이 잠들지 않도록 깨우며, 이 평조합원들이 상층에 고착화되는 타협적인 노조 관료 기구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이로부터 독립적인 자신의 능동적인 조직들을 계발하도록 지속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이런 활동들이,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 능동적으로 움직이면서 투쟁과 노동조합의 주체로 우뚝 서려 하는 평조합원들의 행동과 결합하는 국면에서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은 이들에게 "이 흐름이 중단 없이 성장하고 체계적인 성과를 획득하려 한다면" 이미 낡아버린 노동조합 상층의 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투쟁기구로 이를 재편해야 함을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운동이 적절하지 않는 길로 향해 뼈저린 패배를 겪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확한 투쟁 요구와 전술, 적합한 조직 형식"을 제 때에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은 평조합원 운동의 지도자로 자신을 입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노동조합의 주도권을 개량주의 지도자들로부터 쟁취해야만 한다.
  물론 상황은 이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비록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대중적 흐름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으며, 때로는 대중들의 거센 주먹에 혼비백산하면서도 개량주의 관료 기구들은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발악하기 때문이다.
  개량주의 노조 관료들이 탄력성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는 상당히 넓다. 그들은 '혁명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범위 내에서는 상당히 탄력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만일 노동대중이 완전히 잠들어 있는 상태라면, 그들은 마치 투사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대중 투쟁의 조직자로 행동하기조차 한다. 대중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동원할 수 없다면, 개량주의 관료들의 입지조차 위협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량주의 노조 관료들의 계급적 정의인 '소부르주아계급'의 지위와도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소부르주아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 나아가서 사회의 전면에 거품처럼 부각될 수 있는 시기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이 팽팽하며, 이에 따라 소부르주아계급이 '캐스팅보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국면이다. 이와 똑같이, 개량주의 노조 관료들이 부각되기 위해서는 자본가와 노동대중 사이의 힘의 균형이 조성되어야 한다. 만일 노동대중의 힘이 전혀 없다면, 개량주의 노조 관료들은 아예 어용이 되어 자본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붕괴될 수밖에 없다. 자본에게 노조 관료란 오로지 노동대중의 투쟁의지를 순화시키고 통제하는 수단일 때만 존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대중을 완전히 잠재우면, 마치 토끼사냥이 끝나면 죽여 버리는 사냥개처럼 노조 관료는 폐기처분된다.
  그러므로 노조 관료들은 조금은 노동대중의 힘을 동원하려 하며, 따라서 노동대중이 잠들어 있을 때는 노조 관료들은 투사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는 노조 관료들에 대한 대중적 폭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그들과 공동 전선을 구성해 대중적 투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의 전술이 된다.
  그러나 대중 투쟁이 고양되면서, 평조합원들의 투쟁의지가 활성화되기 시작할 때, 노조 관료들은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그들은 조합원들의 투쟁동력을 전면화 하기보다는 이를 자신의 통제력 하에 묶어두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려 한다. 그들은 노동조합 교섭기구를 안착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 노조 관료들의 정상적 작동 수단을 획득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성장하는 투쟁력을 교섭의 압력 수단 정도로 찌그러뜨리고, 철저히 종속시키는 작업이 그 때 시작된다. 자본 또한, 이 시기에는 성장하는 투쟁력을 가라앉히기 위한 수단으로 교섭 기구를 활용하면서 노조 관료들의 지위를 합법화해주고 존중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배신적 타협'이 시작되며, 노조 관료들은 성장하던 투쟁동력에 찬물을 끼얹기 시작한다. 그 뒤, 만일 조합원들의 투쟁동력이 어느 정도 살아 있고,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면 노조 관료는 '교섭 기구의 틀'을 안착화 시킬 수 있게 된다. 조합원들의 잠재력을 두려워하는 자본은 이 잠재력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교섭 기구들이 존중될 필요가 있음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것이 그렇듯이 자본은 단순히 양보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호시탐탐 객관적 상황을 체크하면서, 사냥개를 내쳐버릴 적절한 시점이 되었는가를 확인한다. 노조 교섭 기구를 무시한다던가 조합원들의 저항에 직면할 만큼 보잘것없는 합의를 노조 교섭 기구에 종용하는 식의 탐색이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힘이 죽어있음이 확인된다면, 그들은 '노조 교섭 기구'에 제공하는 사소한 양보조차 거두어들일 것이다. 따라서 바로 이 시점에서, 노조 관료들은 토사구팽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섭(기구)의 압력판으로 조합원들을 동원해야 한다는 점을 직감한다. 만일 조합원들의 투쟁을 '약간' 동원해 자본에게 '여전히 조합원들은 투쟁할 태세가 되어 있다. 때문에 이 폭발성 있는 뇌관을 건드리지 않고자 한다면 당신들은 우리 노조 관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협박하는 데 성공한다면, 자본은 여전히 양보할 필요가 있다고 계산하면서 그들을 존중할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교섭의 압력 수단 정도로 투쟁이 배치되며, 다른 한편으로 이 투쟁은 정상적인 교섭이 가능하다고 판명된 바로 그 순간, 다시 말해 조합원들의 투쟁의지가 충분하다는 점이 증명된 바로 그 순간에 '중단'을 요구받는다. 오직 노조 관료 기구가 조합원들의 투쟁동력을 너무 매장시켜버린 나머지 이제 조합원들이 잠들어버린 그 시기에만 전면적인 투쟁이 배치되기 시작한다. 대중들이 잠들어있음을 확인한 자본은 사정없이 교섭 기구들을 흔들면서, 완전한 항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할테면 해봐라. 당신들은 조합원들을 동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잠자코 우리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라!'고 그들은 최후통첩을 보낸다.
  이 때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조 관료들은 대중 투쟁을 조직하려 한다. 그런데 '전투의 시점을 결정할 수 있는 부대라면 승리의 90%는 손에 쥔 것에 다름 아니다'는 전쟁의 격언이 여기에 적용된다. 노조 관료들이 조합원들의 투쟁력을 얼마나 매장시켜버렸는지를 면밀히 추적해온 자본은 '적절한 시점'에서 '노조 관료들에게 항복'을 강요하며 결투 장갑을 던진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교섭 기구들이 위험에 처한 그 순간 노조 관료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전투를 결의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가장 불리한 시점'에서 전투를 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래서 전투는 십중팔구 자본의 손쉬운 승리로 끝나고 말거나 조금이라도 노조 관료들이 강하게 저항한다면 '장기화'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장기 투쟁은 노동자들에게 대단히 불리한 조건에서 감행되는 투쟁이므로 대개 노동자들의 쓰라린 패배로 마감하고 만다. 결국 노조 관료들의 타협성과 배신 때문에 노동대중이 심각한 패배를 겪고, 쓰라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반면 조합원들의 투쟁 동력이 충만하고, 그리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아주 유리한 조건에서 노조 관료들은 투쟁을 중도 파탄시킨다. 그들에게는 바로 이 국면이 '교섭 기구의 안정성'이 최대로 견고해지고, 그 위상이 높아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투쟁력의 전면화 시점, 즉 자본의 패배가 예견되는 바로 그 시점이 자본에게는 '교섭 기구의 중재자 역할'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고, 노조 관료들이 가장 요청되는 시기인 것이다. 결국 노조 관료들의 영향력을 뚫고 투쟁이 중단 없이 전진하지 않는다면, 투쟁은 승리를 목전에 두고도 소심한 타협으로 끝나고 단지 교섭 기구들에 또아리를 튼 노조 관료들의 입지만을 강화시켜주고 만다. 이런 식으로 노동자들은 승리를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전투의 전면화' 깃발을 올리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만다. 결국 노조 관료들의 기능은 "노동자들에게 가장 유리한 국면에서 전투의 전면화를 가로막는 대신 가장 불리한 국면에서 전투를 전면화 시키는 제일 멍청한 장군의 기능"이다.

  여기서 다음의 원칙이 제기된다. "노동조합 교섭 기구가 아니라 평조합원들의 정서와 투쟁 분위기, 물질적 이해, 기능, 상황 판단에 좌우되는 노동조합만이 적절한 시점에서 전투를 감행해 승리가능성을 높이고 패배를 적극 피할 수 있다! 교섭 기구의 이해가 아니라 평조합원 대중의 이해와 투쟁동력에 입각해 움직이는 노동조합만이 제 때 투쟁하고 전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합원들이 잠들지 않고 투쟁하는 통상적인 시기에 혁명적 투사들이 취해야 할 전술적 태도는 조합원들의 투쟁동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이에 입각해 노조 관료들의 타협과 굴종을 뛰어넘어 전진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노조 관료들의 동요성을 폭로하고, 그들의 투쟁포기 의도를 정확히 드러내면서, 투쟁을 전진시킬 수 있는 정확한 수단을 제기해야만 한다. 오로지 대중 투쟁력이 체계적으로 상승할 때만, 그런 폭로 작업은 효과적일 것이며, 노조 관료들을 아래로부터 압박해 끌고 나가면서 투쟁의 전진을 보장할 수 있다. 만일 노조 관료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버린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을 전면 폭로하고, 투쟁하는 지도부를 새롭게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비록 머뭇거리고 방해하면서라도, 그들이 따라 온다고 해도 좋다. 중단 없이 상승하는 투쟁을 통해 조합원들은 승리를 쟁취할 것이며, 이를 통해 더욱 멀리 전진할 수 있는 견고한 토대를 쟁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노조 관료들은 더 이상 투사로 자신을 부각시키지는 못하며, 또한 투쟁하는 조합원들을 뒤따르고 있을 뿐임이 분명하겠지만, 상당한 탄력성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투쟁의 수위가 높아지면 질수록 숨이 턱까지 차서 도저히 더 이상 쫓아 올 수 없어 자신의 실체를 분명히 드러내면서 대중적으로 폭로 당하는 노조 관료들의 비율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일부 좌익 노조 관료들의 경우, 탄력성의 범위는 상당히 높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노조 관료들도 도저히 쫓아 올 수 없는 경계선은 있다. 혁명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며, 행동으로 옮기기를 죽도록 거부하는 그들의 본성상, 그들은 노동대중의 투쟁이 혁명적 국면에 접어들면 어떤 식으로건 혁명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들 중 극소수라도 혁명의 편에  서는 경우는 전적으로 이미 혁명의 승리가 거스를 수 없음이 분명한 시기로 제한된다. 이 때 그들은 혁명의 어깨 위에 타서 기득권을 사수하려 할 것이지만, 반혁명이 강화되거나 혁명이 더욱 근본적인 단계로 상승하면 결국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모든 노조 관료들은 노동대중의 운동이 전진하면, 한편으로는 도태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신'한다. 그들은 단지 말이면 충분한 시기에는 기꺼이 '혁명에 찬성'할 것이고, 특히 노동자 투쟁의 수위가 지속적으로 높아지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대중의 투쟁이 격화되고, 혁명의 방향으로 성장하며, 나아가서 혁명이 눈앞에서 현실화되기 시작하면 그들의 압도적 다수는 '변신'조차 중단하고 개량주의적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그들은 노동대중의 폭발적인 투쟁을 개량적 수로 내로 가두고, 자본주의 체제의 통제선에 묶어두는 '혁명의 파괴자' 역할을 본격적으로 개시할 것이다.
  이 때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에게는 '노동조합 관료'들과의 필사적인 전투가 지상명령으로 제기된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가 없다면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광범위한 노동자들을 혁명으로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으로 노동대중의 투쟁력을 강화하고, 그들의 혁명적 의식을 고취하지 않는다면 노조 관료들과 제대로 맞설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광범위한 노동대중 스스로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조 관료들과의 공동 전선 전술'이 구사되겠지만, 그것은 노조 관료들과의 전투에서 대중적으로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배치될 것이다. 대중적인 혁명의 파고가 높아지면 결국 다수의 노동조합 관료들은 궤멸될 것이며, 극소수는 살기 위해서라도 혁명의 편을 드는 흉내라도 내야 할 것이다. 어떤 식이건 그들의 영향력은 그 시점에서 제거될 것이고, 또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다음의 점 또한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노조 관료와 맞서면서 노동대중의 투쟁력을 끊임없이 고양시키는 것은 혁명적 투사들의 일관된 의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렇지만 노조 관료들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고 그들의 영향력을 노동조합에서 추방하는 작업은 오직 혁명의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면화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대중의 혁명적 전투성이 솟구치고, 노조 관료들의 '탄력적인 고무줄'이 끊어질 듯 말 듯 한계에 봉착하는 혁명의 시기에 이르러서야 노조 관료들에 대항한 전투에서의 전면적인 승리가 가능해질 것이다. 반면 일상적 시기에는 노조 관료들은 빈번하게 대중적 압력과 비판에 직면하더라도 '곡예사 놀음'을 반복하면서 교묘하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들의 탄력적 고무줄이 아직 상당한 여유가 있을 뿐만 아니라 조합원들의 투쟁력과 의식 또한 아직 개량적 수준의 전투성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적 시기에서도 혁명적 투사들은 노조 관료들에 대한 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한다. 또한 이 시기에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은 노조 관료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더라도, 과감한 투쟁을 통해 대중들이 투쟁력과 의식을 키우고 혁명적 지향을 발전시키도록 돕고 노조 관료들의 권위에 대한 대중적 비판의식과 저항의식이 성장하도록 체계적으로 고무해야 한다. 그리하여 혁명의 시기를 앞당기고, 혁명의 시기에는 보다 빠르고 보다 단호하게 대중 투쟁을 조직하면서 노조 관료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나아가서 예외적일지라도, 일상적 시기에도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이 노동조합의 지도권을 쟁취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 때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은 조합원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가장 강력한 투쟁을 조직해 '노동조합이 나아가야 할 길을 선명하게 보여주며', 이러한 모범을 통해 노동조합운동에서 만연한 노조 관료들의 무기력성과 타협주의를 폭로해야 한다. "상황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노동조합운동이 퇴행하고 추락하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현장의 투사들이 노조 관료들의 통제를 뚫고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의 문으로 다가서도록 이끌어야 한다.  

  2) 평조합원 운동의 운명

  '노조 관료'의 적대적 대립물이 '평조합원 운동'인가? 어떤 사람들은 확고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현장에서 노조 관료들과 맞서는 투사들의 일부까지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특정한 시기와 조건에서는, 가령 평조합원들이 잠들어 있거나 노사협조주의에 사로 잡혀 있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직 '노조 관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혁명가들이 '평조합원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는 점에서만, 그리고 노동조합운동의 계급화, 혁명화는 지도부의 혁명적 재편과 나란히 평조합원들의 운동을 계급적이고도 혁명적인 방향으로 조직하는 과업을 포함해야 한다는 점에서만 그것은 타당한 추론일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선진 투사들이 공감하는 '평조합원 운동'은 바로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 무정부주의자들은 그로부터 평조합원 운동을 조직하는 것으로 노조 관료제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는 틀린 추론을 끌어낸다.
  그렇지 않다. '노조 관료제'는 평조합원들의 수동성과 무기력, 계급의식의 결핍에 조응하며 그것과 나란히 존재한다. 양자 모두 '개량적 노동운동'의 불가피한 산물로서, 단지 위와 아래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을 뿐이다. '노조 관료'와 '무기력하고 수동화된 개량적이며 조합주의적인 평조합원' 모두의 적대적 대립물은 "혁명적 노동운동"이다. 그리고 이 "혁명적 노동운동"은 혁명적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자주성과 잠재력이 해방되며 계급적이고 혁명적인 의식을 체득한 평조합원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우선 '개량적 노동운동'의 대립물로서 '혁명적 노동운동'이 있다. 다음으로 이 개량적 노동운동의 두 측면인, '노조 관료'의 대립물로 '혁명적 지도자'가 있고, '개량적 노동조합원'의 대립물로 '계급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조합원'이 있는 것이다. 이것만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일 뿐만 아니라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의 입장이 될 수 있다.
  '평조합원들의 자주적 운동'은 '혁명적이고 계급적인 지도자들'의 지도력과 긴밀히 연결될 때만, 중단 없이 성장할 수 있고 혁명적 방향으로 진군할 수 있으며 노조 관료들과 제대로 일관되게 맞서면서 혁명적 노동운동의 견고한 토대를 구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평조합원 운동에 대한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자들의 지도력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이 모든 곳에서 평조합원들이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성장하고, 바로 이들의 계급의식과 투쟁력에 의지하는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투쟁 기관으로 노동조합을 우뚝 세워내는 데 전력을 다하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에서 가장 기본적 실천이다. 그러나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은 때로는 조합원들의 조합주의적 편견과 개량적 의식, 노사협조주의적 타락 등에 맞서 투쟁해야 하며, 계급적인 단호한 소수파로 남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굽힘 없이 계급적이고 노동해방주의적인 대의와 견해를 대표해야 하며, 평조합원들이 아직 극복하지 못한 한계들에 대해 '정확히 지적'해야만 한다. 심지어는 평조합원 다수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계급적 입장을 수호해야 한다. 즉 평조합원들의 투쟁력과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만, 그럼에도 평조합원들의 후진성에 굴종해서는 안 된다. 혁명적이고 계급적인 입장에서 평조합원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분투해야지, 평조합원 운동이라는 이름 하에 조합원들의 후진성에 굴종하고 단순히 대중적 운동을 조직하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평조합원 운동의 운명 자체가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의 지도력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조해야 한다. 언뜻 보기에 평조합원 운동은 노조 관료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대중적 운동이 지도자들과 연관 없이, 그리고 깊숙이 영향 받지 않고서 전개될 수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평조합원 운동은 만일 개량적이고 조합주의적인 궤도 내로 제한된다면, 노조 관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평조합원들의 의식과 정신이 기본적으로 노조 관료의 그것과 일치한다면, 일시적인 충돌에도 불구하고 대립은 날카롭게 성장할 수 없으며, 결국 노조 관료의 설득과 지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이 노조 관료의 영향력으로부터 평조합원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독립적인 평조합원 조직'(가령 평조합원 선봉대, 소위원 기구, 총회 등)을 강조하더라도 그것은 '보다 용이한 실천 조건'을 제공할 뿐 그 자체로 성과를 보장하지 못한다. 평조합원 조직이 갖고 있는 의식이 개량적이고 조합주의적이라면,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노조 관료의 지도를 받아들이고 노조 관료와 융합하면서 그 수동적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이 독립적인 평조합원 조직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노조 관료들의 영향력을 평조합원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차단시키면서, 평조합원들이 자신의 자주적인 행동과 투쟁 속에서 계급적이고 혁명적인 방향으로 전진하는 데 훨씬 '유리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유리한 수단'을 항상 강조하고 그것이 노조 관료들의 방해를 뚫고 활성화되도록 만들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단지 더 유리한 수단일 뿐 그 자체로 성과를 보장하지 못한다.
  체계적이고 일관되며 근본적인 성과는 오직 평조합원들의 의식과 조직을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이 계급적이고 혁명적인 방향으로 전진시킬 때만 획득될 수 있다. 때문에 '유리한 수단'은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의 지도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보다 효과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수로일 뿐이다. 이 지도력이 노조 관료들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평조합원 조직 속으로 체계적으로 흘러 들어가서 평조합원들의 의식과 조직이 노조 관료의 그것과 대립할 때만, 그리고 바로 그 대립 정도만큼만 노조 관료에 맞서는 평조합원 운동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그 독립성을 강화할 수 있다. 물론 이 독립성이란 무정부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지도자 일반'으로부터의 독립성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노조 관료들, 즉 개량주의 지도자들로부터의 독립성을 뜻할 뿐이며, 혁명적 지도자들과 관련되는 한, 그것은 독립성이 아니라 상호융합을 뜻한다.
  평조합원 운동의 운명은 한편으로는 조합원 대중의 잠재적 투쟁 본능과 계급적 의식이 얼마나 발휘되느냐,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지도자들이 얼마만큼 평조합원 운동을 지도할 수 있느냐에 의해 좌우된다. 평조합원의 투쟁 본능과 잠재적 계급의식이 충분히 발휘될 경우, 노조 관료들은 위협받으며 평조합원 운동은 자주성을 갖고 상당히 활성화될 것이다. 그러나 투쟁 본능과 잠재적 계급의식은 혁명적 지도를 통해 계급적이고 혁명적인 투쟁과 확고한 계급의식으로 성장할 때만 비로소 공고화되며, 연속성을 가질 수 있다. 때문에 혁명적 지도자들의 체계적인 영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면 평조합원 운동의 독립성과 능동성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노조 관료라는 독소에 영향 받으며 결국 사그라들고 만다. 혁명적 지도자들의 계급적, 혁명적 영향력이 발휘될 때만 평조합원 운동은 전면적으로 활성화되며, 노조 관료의 통제를 뚫고 혁명운동의 수로로 합류할 수 있다.
  혁명적 투사들은 평조합원 운동의 활성화에 의지하면서도, 이 운동에 혁명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만 이 운동은 중단 없이 성장할 수 있고, 노조 관료의 통제력을 뚫고 만개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대신, 단순히 평조합원 운동을 노조 관료에 대치시키면서 환상을 갖는다면, 혁명운동의 전진도 평조합원 운동의 전진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결론짓자. 평조합원 운동은 무언가 순수하게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그런 운동은 아니다. 때로는 그것은 노조 관료와 마찬가지로 개량주의와 조합주의, 노사협조주의에 감염되어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 때 혁명적 선진 투사들은 평조합원 운동과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독립성을 사수해야 하며 심지어는 평조합원들에게까지 스며든 개량주의에 대항해야 한다. 평조합원 운동이 노조 관료에 부분적으로 대립하면서 전진하기 시작할 때, 혁명적 선진 투사들은 이 평조합원 운동의 활성화를 추동하되, 그것에 계급적이고 혁명적인 영향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이 운동이 중단 없이 성장하고, 노조 관료에 정면 대립하도록 적극 지도해야 한다. 혁명의 시기에, 평조합원 운동이 혁명의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이동하기 시작할 때,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은 노조 관료를 타도하고 혁명적 지도력으로 노동조합을 재조직함으로써 혁명적 지도자들과 혁명적 평조합원 운동이 융합한 혁명적 노동운동을 조직해야 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혁명을 향해 파도치는 노동자 투쟁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우뚝 세워내야 한다.

  5.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와 투쟁하는 노동자들

  1) 노조 관료와 혁명적 지도자 사이의 중간에 포진한 노동조합 지도자들

  혁명적 노동해방주의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모든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노조 관료인 것은 아니다. 우선 어떤 지도자들은 평조합원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교섭주의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전투적 지도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지도자들은 '개량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며, 단지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의 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지도자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노조 관료로 정의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오류이다. 이들은 혁명적 지도자들은 아직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조 관료로 전화해 조합원들을 수동화시키고 조합주의를 유포하며 투쟁을 가로막는 지도자들도 아직 아니다. 이들은 아직 뒤를 돌아다보고 퇴행하는 지도자들이 아니며, 어디로 나아갈지가 아직 유동적인 층이다.
  그러나 그런 유동적 상태는 무한정 지속될 수 없다.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지도자로 전진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불가피하게 개량주의 지도자로 퇴화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노조 관료로 전화하고 만다. 이는 노동조합운동이 혁명운동과 분리되어 자생적으로 걷게 되는 길은 다름 아닌 노동조합주의의 길이며, 이는 개량주의로 직행한다는 진리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이다. 때문에 혁명운동과 분리된 노동조합의 길을 오래 간 곳일수록 지도자들의 노조 관료로의 전화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직 유동적인 지도자들이 노조 관료로 전화하는 것을 불가피하다고 보고, 노조 지도자 일반을 '노조 관료'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의 입장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이 유동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의 세례를 가해, 단호하고 헌신적인 혁명적 지도자로 육성하는 것이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의 지도 방침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유동적인 지도자층은 신규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제 막 대중들 한복판에서 지도자로 뛰어오른 상태이며, 교섭이 아니라 투쟁에 복무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대중 투쟁을 헌신적으로 조직하지 않는다면, 노동조합 기구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들과 관련해서는, 혁명적 노동해방주의는 그들의 투쟁에 동지로서 함께 하면서, 끈기 있는 영향력 행사를 통해 그들을 혁명적 노동해방주의로 인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노조 관료로 성장하는 대신 혁명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유동적 상태 --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기간은 전체 노동운동의 상황과 이들 지도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객관적 투쟁 조건에 좌우된다 -- 는 계속되지는 않으며, 상급 노조조직이나 개량주의 노동단체들, 개량주의 당들의 영향력이 지금처럼 강력하다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노조 관료로 전화할 수 있다. 때늦지 않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그들을 혁명적 노동해방주의로 이끌어야만 노조 관료로의 전화를 막을 수 있다.
  이들 유동적인 지도자층에 대한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의 전술적 태도는 다음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그들이 대중과 분리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투쟁을 조직하는 이상 그들과 동지로서 나란히 함께 전진하며, 그들의 승리를 돕는다. 그러나 그들이 대중과 분리되고, 투쟁으로부터 벗어나는 이상 우리는 그들을 노조 관료로 규정하고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비판과 투쟁을 조직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이 대중성과 투쟁성, 민주성을 잃지 않도록 주변의 개량주의 관료들이 미치는 영향력에 맞서 투쟁하며, 그들을 혁명적이고 계급적인 투사로 육성하기 위해 최선의 지도력을 행사한다.
  
  2) 개량투쟁과 개량주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위해 투쟁한다고 그들이 개량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혁명적 노동해방주의 투사들은 이 투쟁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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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수정해 다시 올립니다. 노동자민중회의 2003.01.14 944
33 한국노동운동사 - 일제하에서 현대까지 현장연대 2003.01.04 872
32 [펌]맑스 사상과 철학 노동위원회 2002.12.29 990
31 [펌] 한국경제공화의 새로운 해석 노동위원회 2002.12.29 867
30 [펌]중국맑스주의의 현주소 노동위원회 2002.12.29 873
29 [펌]토리노공장의 평의회 운동 노동위원회 2002.12.29 783
28 [펌]프로레타리아트 독재 노동위원회 2002.12.29 862
27 [펌]국제공산주의 운동사 노동위원회 2002.12.29 808
26 [폄]한국산별노조(전평산별을 중심으로) 노동위원회 2002.12.29 892
25 [펌]현장조직론 노동위원회 2002.12.29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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