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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까지 초창기 노동운동

공돌이 2002.10.16 15:30 조회 수 : 1981 추천:42

1848년까지 초창기 노동운동

1968년 이전의 유럽 좌파 중 일부
볼프강 아벤트로트 지음/ 신금호 옮김
출판사 : 책벌레


공장제 수공업은 16세기 중반에서 18세기 후반까지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이었다. 공장제 수공업의 첫 단계에서는 여러 직종의 숙련공이 자본가의 지휘 감독하에 미숙련 노동자들과 함께 한 작업장에서 노동을 했다. 점차 공장제 수공업은 숙련공이 분담된 작업만 맡다 협동하는, 즉 분업에 기초한 협업 형태로 발전했다. 전반적으로, 노동자의 작업은 분업에 의한 기계적 활동으로 바뀌어 갔으며 생산비도 낮아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공장제 수공의 발전에 따라 도제는 직업적 긍지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공장제 수공업 시대 전에도 직공들은 노동력을 팔아야 했지만, 그래도 그 때는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과 실제적인 기회가 있었다. 동업조합(길드)의 규정이 독립을 제한했기 때문에 도제들은 도제 클럽을 조직해 작업 조건과 생활 개선을 요구하는 동시에, 동업조합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팽팽히 맞섰다. 가끔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지속적으로 운동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공장제 수공업의 발전 덕분에 이제까지 각각 종속된 생산자들의 가내공업 형식이 바뀌어, 그들은 동일한 지붕 밑에서 작업하게 됐다. 공장제 수공업이 도입되자 사장·장인·도제의 인간 관계는 그 현실적 의의를 상실하게 됐다. 사회적 분업은 각 개인이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었고, 각 개인을 철저하게 고립시켜 작업의 전체적 진행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조금도 알 수 없도록 했으며, 엄격한 규율에 복종하게 했다.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은 이러한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기계는 이렇게 끊임없이 퍼져 나가는 혁명의 중심이자 근원이었다. 기계는 숙련 노동자들을 직장에서 쫓아내고 그들을 대신했는데, 이것이 모든 생산 과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공장제 수공업에서는 사회적 노동조직은 상이한 작업을 결합시키는 주관적인 것이었지만, 근대 산업에서는 생산적 유기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므로 노동자는 이미 주어진 물질적 생산 조건의 단순한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제는 전처럼 특별한 기술이나 격렬한 근력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 이와 동시에 여성 노동과 노약자와 어린이의 노동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초반 유럽 자본주의의 특징이었으며 20세기에도 식민지와 개발 도상국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이것은 인류의 물질적·정신적 행복에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윤추구는 자본가들의 최대 목적이므로 그들은 기계를 계속 가동하려 한다. 따라서 기계의 발명과 사용은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강도 강화를 초래하게 된다. 공장제 수공업의 초기에는, 사회의 여러 집단 사이의 이해관계는 달랐지만 노동자들은 이 체제를 그럭저럭 참고 견뎌나갔다. 특히 강제적이고 조직적인 울타리 치기 운동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농민들이 토지에서 추방됐고, 변화된 새로운 산업 생활을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임금과 노동시간에 대한 투쟁은 발생했다. 이러한 투쟁으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고용주의 이익이 상반된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눈뜨게 됐다. 산업화의 진행과 더불어 생산수단으로서 기계는 노동자와 경쟁했고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았다. 그리하여 기계가 나타나는 곳은 어디서나 산업 예비군이 발생했다. 이러한 실업자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는 이었지만 아주 나쁜 노동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리카도가 말한 바와 같이, “지주와 자본가를 위해 토지에서 수입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바로 과잉 인구를 발생시키고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켰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첫 반응이 기계 파괴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찍이 17세기 유럽에서는 리본과 레이스 직조기에 대한 폭동이 있었다. 처음에는 기계 사용이 금지돼 영국에서는 1765년에 색스니 지방의회만 기계를 인정했을 뿐이다. 1758년에는 영국 노동자들이 최초의 양털 깍는 기계를 파괴했다. 대중의 이러한 기계 파괴 위협에 대해 영국 의회는 공장을 파괴하거나 기계를 파괴하는 행위를 범법 행위로 취급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노동자들은 이 법률을 없애는 청원을 여러 차례 제출했다. 19세기 초에 또다시 노동자들은 폭력적인 대중 행동을 했으며 1811년부터는 기계 파괴 운동이 더욱 세차게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시인 바이런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1812년에 기계 파괴자를 사형이라는 극형에 처할 수 있는 법률을 상원에서 통과시켰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마침내 공포 정치에 의해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1813년 요크에서 18명의 노동자가 처형됨으로써 폭동이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점차 영국 노동자들은 맑스가 말한 바처럼 “기계 자체와, 자본이 기계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구별해 물질적 생산설비가 아니라 생산설비의 사용 방식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됐다. 그렇지만 기계 파괴 운동은 19세기 중반에도 계속 끊이지 않았으며, 1831년 프랑스 리옹 견직공들의 봉기나 독일 슐레지엔 섬유공들의 봉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나라의 산업화에서도 초기에는 모두 나타난 현상이었다. 산업 자본주의 초기에는 노동자의 교육 수준이 대단히 낮았으며 임금수준도 계속 하락했으므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뿐 아니라 자식들의 노동력까지 팔지 않으면 안 되는 비참한 상태였다. 노동자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공장에 보내야 했기에 교육 수준은 계속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반발이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미 중세 말경 정태적인 자연법 사상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법률은 노동자가 단결된 행동으로 자신의 노동과 생활을 결정할 권리 자체를 빼앗았다. 1731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발표한 ‘길드에 대한 법령’은 도제 조합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유럽의 모든 국가는 이 법을 따랐으며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이 법은 계속 존재했다. 자연법 사상을 주장한 합리주의자들과 중농주의자와 자유주의적인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과 자유 경쟁을 보호하고, 자유 경쟁을 제한하는 ‘특수 이익 집단’의 결성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가 자신을 열등한 ‘하층 계급’으로 천시하는 한 이러한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부 뛰어난 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이 만인을 위한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 할 수 있도록, 또한 소수의 이익에 희생당하는 일이 없도록 자연법 사상이 구현하려 하는 만인을 위한 자유를 모든 사람에게 부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노동자의 요구 사항과 급진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의 요구 사항을 구별할 줄 몰랐다.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혁명적 지식인 계층과 노동자들이었으며, 유럽의 반혁명 연합에 반대해 혁명과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 속에서 국제적 단결이라는 이념의 사회적 기반을 형성한 사람들은 영국 노동자들이었다. 영국 런던의 구두 제조공인 토마스 하디가 1792년 최초로 노동자들과 기능공 자신의 단체인 '통신협회'를 만들었다. 당시는 토마스 페인이 <인간의 권리>(1790년대 초판 발행)를 출판해 민주주의적 자연법 사상을 설명하던 때였다. 이 '통신협회'라는 단체에는 2년이 채 안 돼 만여 명의 노동자가 가입했으며, 프랑스가 영국에 대륙 봉쇄령을 내렸을 때 이 노동자들 중 일부는 몇몇 지식인들과 산업 자본가에게서 지지를 얻기도 했다.
1795년 10월 프랑스에 대한 전쟁 종식을 요구하는, 조지 3세와 피트 수상 반대 시위가 런던 에서 일어났는데 이러한 소요 사태는 1797년 해군 함대 반란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자 1799년 '토론회'는 금지되고 다시 1800년 노동조합의 결성을 금지하는 단결금지법 - 1794년 의 인신 보호 영장 제도의 유예에 의해 보충 - 이 통과됨으로써 소요사태는 가라앉게 됐다. 독일의 경우에도 1792년과 1794년에 발생한 슐레지엔의 섬유공 폭동은 자코뱅주의의 민중적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덕분에 유럽에서는 인권에 대한 인식과 민주주의 이념의 실현이 가능하게 됐다. 이것은 주로 1793년 프랑스 헌법상의 민주주의적 참정권 획득과 자코뱅의 혁명적 독재 성공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도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노동자들의 사회적·경제적 독립을 의미하지는 못했다. 새 기계의 사용이 공장제 수공업에 미친 영향, 즉 유럽 산업의 급격한 성장은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 곧 나폴레옹 제1제정 시기의 대륙 봉쇄라는 보호 아래 시작됐을 뿐이다. 비록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발발 이래 1794년 7월 9일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할 때까지 도제들과 공장제 수공업 노동자들이 혁명적 활동에 앞장섰지만, 노동자들은 공안위원회가 통치하던 시기에도 지롱드 법령을 폐지하지는 못했다. 1791년 6월 4일 제정된 이 지롱드 법령을 모든 노동자들과 기능공들이 단체를 결성하는 것을 자유와 인권 선언 - 지롱드가 완전히 개인주의적 성격을 갖게끔 만든-을 위협한다는 미명으로 금지한 것이다. 테르미도르 반동, 즉 혁명적 지식인과 소부르주아지의 통치 대신에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확립되자 노동자들의 정치적 행동은 일단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바뵈프는 1796년 집정내각의 처지를 선전이나 '평등당' 의 비밀 모의에 이용하려 했다. 바뵈프는 정치적 평등은 선언됐지만 사회적 평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 때문에 민주주의는 실패했다고 주장하면서 상속권이 폐지된 사회주의적 농업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혁명적 독재권을 확립하려고 했다. '평등당' 의 재판과 바뵈프의 처형으로 이 운동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지만, 1828년 부나로티가 출판한 <평등당의 모의에 관한 역사>는 7월 왕정 복고 후 혁명적 민주주의자들가 노동자들이 지하 조직을 만드는 데 이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영향은 다른 나라까지 퍼져 나갔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은 유럽 노동운동의 발전에 중요한 전제 조건을 확립했다. 그것은 인권을 위한 투쟁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국제적 단결이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사회적 투쟁의 결과 노동자들은 어떻게 하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자 소그룹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지배가 경제 생활의 명백하고 신성불가침한 원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집정내각, 통령 정부, 제 1제정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프랑스와 유럽의 노동자들은 혁명적 대변혁으로 피폐화되고 무력화된 반면 공업화는 부르주아지의 세력이 강한 프랑스의 서부 독일 등에서 급속도로 진행됐으며 특히 나폴레옹 군사통치 시기에 뚜렷이 드러났다. 그 결과 부르주아지의 경제력은 성장했고 따라서 다른 노동자보다 공업 노동자의 위치가 중요시됐는데 처음에는 아직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왕정복고가 됐음에도 권력이 약화되자마자 공업 노동자의 위치가 중요시되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됐다. 혁명 전의 구질서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시대착오적으로 새로운 계급의 중요성을 가볍게 일축하고 말았다. 따라서 부르조아지는 노동자를 투쟁의 보조자로 삼아 야당, 즉 자유주의적 반대 세력을 만들었고 이 반대 세력 속에서 노동자의 의식은 계속 발전했다.
공업이 발달한 영국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더욱 진전됐다. 프랑스에 대한 승리로 강화된 보수 반동 세력이 정치권력을 놓고 산업 부르주아지와 다투었다. 영국의 부르조아지는 강력한 지위와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다른 나라보다 이러한 투쟁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밝은 전망을 갖게 됐다. 영국의 산업 자본가는 자신들의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하고 관세와 대외 정책을 자신들의 요구에 적합하도록 하기 해 새로운 노동자층과 함께 선거법 개정을 위한 활동을 재개했다. 1819년 피털루의 대중시위에서는 노동자들이 최초로 자신들의 사회적 요구 사항을 내걸었는데 이것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정치적 지배 집단과 경제적 지배 집단 사이의 심한 갈등으로 인해 단결 금지법은 폐지된다. 불법화돼 있었지만 계속 존재했던 노동조합은 이제 공개적으로 싸울 수 있게 됐다. 당시의 경제호황은 투기가 팽배하던 1825년 계속적으로 파업으로 노동조합 결성 권리는 부분적으로 축소됐지만 영국 노동자들에게서 단결권을 더는 빼앗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1825년의 공황 때 노동조합이 제 기능을 발휘한다면 호황 때의 생활수준을 불경기에서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알게 됐다. 협동조합의 창시자들인 로버트 오웬과 윌리엄 키의 이론은 생활 안정을 요구하는 이러한 운동에 많은 도움을 줬다. 공업화 된 새 시대가 요구하는 숙련과 높은 수준의 임금과 교육을 받은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이러한 운동에 커다란 힘이 됐다. 선거법 개정을 둘러싼 부르주아지와 지주 사이의 싸움은 협동조합과 노동조합 운동을 발전시켰다. 노동자들의 합법적 조직이 마침내 민주주의와 협동적 사회주의 정신에 입각해 사회 변혁을 위한 운동으로 확산됐다. 1829년 존 도쳐티가 조직한 방적공 조합과 1830년 전국노동보호협회가 설립될 때까지 오웬주의- 이 때까지는 박애주의와 개량주의- 가 노동운동의 중심이 되는 이론적 지주였다. 물론 노동자들은 1832년 선거법 개정안에서 상류 계급의 새 절충안에 의해 자신들의 정치권 권리를 완전히 빼앗겼다. 노동자들은 선거법 개정 운동과 같은 결정적 좌절을 아직까지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당분간 그들이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에 모든 희망을 집중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웬은 그의 저서 <라나크 지방 보고서>(1820년)에서 '노동 시장' 에 관한 자신의 계획을 발전시켰다. '노동시장' 에서는 협동조합에서 노동한 시간과 동등한 가치의 상품이 교환 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새로운 경제질서가 현존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833년에 '일반 노동조합'의 설립계획이 수립됐는데, 이것은 생산자 협동조합에 노동자들을 결집시켜 자본가에게서 노동력을 빼앗아 버림으로써 사회주의 경제를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1834년에는 '전국노동조합대연합' 이 만들어졌다. 오웬은 계급투쟁이란 어구는 생각지도 않았으며 자본가적 경영자를 협동조합 구조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생시몽처럼 봉건 영주나 국가에 반대하는 모든 생산적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새로운 도덕 세계> 라는 저서에서 오웬은 계급간의 완전한 조화를 상정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해져 더 나은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요구하는 노동자 운동이 증가했으며 기업가들도 이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했다. 따라서 거대한 조합과 그 협동 이념은 무너지게 됐다. 공장주는 노동조합원의 고용을 거부했으므로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조합원 자격을 비밀로 해야 했다. 이것은 정부로 하여금 그 조합들을 비밀 조직으로 몰아세워 공격하는 구실을 주었다. '전국노동조합대연합'은 기습을 받고 급격히 쇠퇴했다. 단지 조그마한 숙련공 조합만이 남았을 뿐 수많은 비숙련공과 저임금 조합의 선구자인 '로치데일 개척자 모임' 일 창립되기도 했고 그 후 주기적으로 오웬의 추종자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미 오웬의 영향력은 빛을 잃기 시작했다.
점차 노동자들은 그들의 행동이 경제적 요구에 머무는 한, 1833년의 공장법과 같은 의회의 개별적 양보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적인 성과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새로 깨닫게 됐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를 위한 참정권을 획득하려는 운동이 다시 초점으로 등장했다.
윌리엄 러빗, 제임스 왓슨, 헨리 헤더링튼 등과 같은 대부분의 런던 노동자 협회 지도자들은 전부터 활동해왔던 사람들로 그들은 영국 노동사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계획, 즉 1838년의 6개 항의 인민헌장을 작성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비밀 투표를 실시하고 공정한 선거구를 확립하며 국회의원들에게 보수를 지불하고 매년 의회를 여는 것 등, 다시 말하면 영국을 완전하게 민주주의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들 곁에는 런던민주협회가 있었는데 이 단체에는 브론테어 오브라이언이 가입해 있었다. 그는 영국 노동자들에게 프랑스 혁명과 봐뵈프에 대한 부나로티의 저서<바뵈프와 평등당의 모의에 관한 역사>를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숙련공 등이 작성한 '버밍엄 청원' 도 인민헌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요구를 한 것이었다. 1839년부터 1843년에 걸쳐 무역 공황과 대량 실업 사태가 발발하자 인민헌장에 대한 요구가 전국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인민헌장 운동 지도자들은 하원이 인민헌장을 부결시킨 후에 온건파인 도덕파와 강경파인 실력파의 의견 불일치로 단결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온건파는 장기적 선동과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과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강경파는 비록 1842년의 대중파업이 무계획적으로 일어났고 불의의 기습을 받아 붕괴됐다 하더라도 결정적 무기는 대중파업이라고 주장했다 내부에 의견 대립이 있었음에도 놀랍게도 300만 명 이상이 서명한 1842년 청원은 그 운동의 위력을 과시했으며, 결국은 의회가 사회적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해 1842년에 광업법이 통과됐다.
산업 자본가가 지주에게 최초로 중대한 승리를 거둔 1846년의 곡물법 철폐도 상류 계급이 인민 현장 운동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0시간 노동법은 수년 동안 노동조합과 인민헌장 운동가들의 경제적 목표였다. 1847년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규제한 이 법률이 통과된 것도 인민헌장 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받은 결과였다. 1848년 4월의 대규모 대중시위가 실패하고 1848년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혁명이 실패하자 인민헌장 운동은 후퇴했다. 맑스는 <자본론> 제 1권에서 1847년의 10시간 법정 노동시간 채택에 대해 "장기간에 걸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간의 다소 은폐된 내전의 결과이며, 영국 노동자는 전체적으로 근대 노동 계급의 선구적 투사"라고 명확하게 그 성격을 지적했다. 맑스는 이 10시간 노동제의 획득이야말로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해 노동자 경제학이 거둔 최초로 위대한 승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동자들은 이 법 덕분에 자신과 가족이 죽음과 노예 상태로 팔려 가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고 말하고 있다.
1842년의 광업법과 1847년의 10시간 노동제는 프랑스의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 사이에 영국 노동운동이 쟁취한 것으로서 유럽 대륙의 노동자들에게 모범을 보여 준 것이다. 비록 그 법률들이 제한적 성격을 갖고는 있었지만 영국 노동자들은 첫째,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국가를 강제로 움직여 노동 경제에 개입하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과 둘째, 노동조합의 직접적 투쟁으로 임금 정책에서 양보 조처를 획득해 노동자의 생활조건과 문화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반면에 만일 노동운동이 없다면 대중은 비참해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됐다.
1848년 유럽 혁명 실패 후 인민 헌장 운동이 쇠퇴했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긍정적인 발전은 조금도 후퇴하지 않았다. 혁명적 민주주의자와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의 필요성 인식은 후기 단계 인민헌장 운동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 민주 동우회는 서기인 조지 줄리언 하니의 지도 아래, 영국에 망명한 혁명가들 뿐 아니라 해외의 혁명적 단체들과도 접촉했다. 1847년 6월 최초로 의회 파견 대의원 선거를 마친 후 인민헌장 운동가들은 1848년 10월 브뤼셀에서 국제 회의를 개최하기로 하고 준비했지만 혁명이 일어나 회의는 취소됐다. 1848년 6월 영국 의회가 3차 대중 청원을 거부한 후(당시 유럽 대륙에서 혁명 실패 후 노동자들 뿐 아니라 모든 민주주의자들이 궤멸당했다) 인민헌장 운동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영국 노동자들은 상당 기간 자신들의 독자적 정치 조직 없이 살아가야 했다.
1847년 경제 공황에 이어 1848년 유럽 대륙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1847년 11월 스위스에서 단기적인 내전이 있은 후 1848년 1월 이탈리아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1848년 2월 24일 프랑스의 부르주아 군주정이 붕괴되는 것을 절정으로 노동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됐다. 1830년 혁명에서는 노동자와 소부르주아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3일 동안 계속 파리 거리를 누비면서 오직 은행 자본가와 독점 기업가 그리고 국왕 루이 필립을 찾아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 당시의 프랑스 노동들은 독자적 계획과 행동을 하기에는 아직 정치의식이 충분하지 못했다. 1831년과 1834년에 프랑스 리옹의 견직공 대파업은 쉽게 분쇄됐다. 1830년 혁명 이전부터 이탈리아의 카르보나리 당이나 기타 이와 유사한 비밀 혁명 조직들이 학생들과 특히 도제 등과 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만들어졌다. 루이 블랑이 <10년의 역사>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 단체들은 단지 부르주아 군주제가 존속하는 경우에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반대하고 민중의 이익에 의식적으로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인민동우회' 블랑키의 '형제회', '계절회' 와 같은 단체들은 모두 동일한 목적, 즉 고도로 훈련된 비밀 모의 조직이 정치 권력을 무력하게 탈취해 노동자를 임금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혁명적 독재권을 성공적으로 장악하게 된다면 민중을 민주적으로 교육시켜 민중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도록 준비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단체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점차 활동적 역할을 담당하게 됐으며 국제주의로 인해 그들은 독일 망명 혁명가·도제들과 결속하게 됐다. 1834년 독일에서는 이런 프랑스의 움직임을 본받아 천민회와 의인 동명동맹을 결성했다.
1830년 이후 프랑스의 부르주아 군주정이 관세 정책으로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가 금융 자본가, 산업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의 모순이 갑자기 첨예해졌다.  그 당시까지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농업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선거 제도에서 소외당했으므로 제도화된 정치는 단지 지배층인 금융 귀족과 그 공식적인 반대파, 즉 산업과 지식 분야의 부르주아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나타낼 뿐이었다. 절대 다수를 점하는 농민층은 혁명으로 획득한 재산에 만족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선거제도에서 소외당했으므로 제도화된 정치는 단지 지배층인 금융 귀족과 그 공식적인 반대파, 즉 산업과 지식 분야의 부르주아들 사이의 갈드오가 투쟁을 나타낼 뿐이었다. 절대 다수를 점하는 농민층은 혁명으로 획득한 재산에 만족하고 있었다. 노동자들도 대부분 영세 기업에 고용돼 있었으므로 노동자들의 투쟁성도 결여돼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 노동자들이 오로지 전격적 기습과 혁명적 민주 독재를 확립하려던 바뵈프의 비밀 모의와 같은 투쟁 방식과 활동 양식을 따랐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1839년 5월 12일 미수에 그친 봉기를 절정으로 끊임없이 소규모 반란이 준비됐다는 사실은 그들의 혁명적 생명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혁명적 생명력은 1848년 2월 혁명과 그 후 1871년 파리 코퀸에서 파리 노동자들의 전투성으로 재연됐다. 블랑키는 모두 합쳐 36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한 뒤 1881년에 사망했다.
그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탁월한 지도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어 그의 장례식은 20만 명의 인파가 관을 따라 무덤까지 행진하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대중적 시위가 됐다. 독일 의인 동맹은 1839년 대규모 쿠데타 미수 사건에 연루돼 칼 샤퍼, 하인리히 바우어, 요셉 몰 등 수많은 활동적 회원들이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1840년에 설립된 노동자 교육협회는 민주주의자들은 물론 다른 나라의 망명 노동자들까지도 포함하고 공산주의 노동자 교육협회와 함께 1917년까지 존속하며 국제 노동운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프랑스 노동들은 이러한 비밀 모의형의 공산주의 운동 외에도 또 다른 곳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그 영향으로 노동운동의 독자적 활동과 노동자들은 고무됐다. 이러한 점들을 이해하지 않고는 프랑스 제 2공화국 초반 노동자의 역할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적 경제의 유력한 특성에 반대하는 이론가들이 산업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사회 변혁기에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샤플 푸리에는 산업 자본주의의 대기업에 반대해 준 자율적인 소규모 협동조합의 연합체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것은 독자적 노동운동이나 투쟁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생시몽이 설명하는 체계가 더 현실적이었다. 생시몽은 대기업은 필연적이며,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 비생산적 계층에 대항해 산업 자본가와 노동자가 함꼐 참여해 사회 체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리에와 생시몽은 추종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일부 노동자층과 특히 루이 블랑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블랑은 일할 권리와 노동의 조직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1848년 2월과 7월 사이에 파리 노동자들이 최초로 독자적으로 들고 나온 중심 구호였다. 다른 한 편 프루동의 신용과 상호부조에 관한 이론은 1848년 6월의 고비 이후에야 프랑스 노동자층에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들은 처음에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과 노동자 알베르가 입각했고 룩셈부르크 위원회가 설치됐기 떄문에 2월 혁명(1848)이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1847년의 공황으로 노동자들을 해고되거나 해고 위협을 받게 됐다. 그러므로 그들을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국가가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다시 유사한 경제적 재앙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했고 오늘날처럼 산업 자본가에게 경제 생활이 전적으로 종속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라쌀레가 국가 보조 기업을 주장한 바와 같이 루이 블랑의 국영 작업장이 이러한 요구에 의해 나타났다. 국영 작업장과 공공 소유의 국영은행을 운영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경제 사회 질서를 점진적으로 제거해 모든 사회 계급의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사실상 루이 블랑은 계급 투쟁없이 오직 소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과 지방 정부를 대표하는 자본가들이 서로 펴오하적 타협을 하는 것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이 블랑을 비판한 블랑키는 장기간의 옥살이 때문에 불평 많은 단순한 말썽꾸러기로 취급받았지만 후에 블랑의 희망사항은 그 허구성이 폭로됐다. 2월 혁명 이후의 쓰라린 경험을 겪고서야 프랑스 노동자들은 블랑키가 자신들의 진정한 이익을 훨씬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848년의 국영 작업장 제도는 응급조치에 불과했다. 시민 방위대에 소집되지 않은 사람들만을 고용했던 것이다. 제헌의회 선거를 치른 뒤 환상에서 깨어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혁명을 위해 5월 15일 시위를 일으켰으며 의회와 정부에 폴란들 혁명을 지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의 관심은 오로지 러시아와 프러시아에 대항에 유럽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연합 투쟁에만 머무를 뿐 조금도 진전되지 않았다. 권력 획득을 위한 5월 15일 시위도 실패했고 결국 오랜 비밀 모의 조직들이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1848년 6월 21일에 제정된 법률은 -국영 작업장에서 미혼 노동자를 쫓아낸다는- 노동자들의 자생적 폭동을 더욱 자극했다. 뒤이어 벌어진 5일간의 전투는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혁명의 성과를 결정지었다. 유럽 대륙 곳곳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는 봉건 반동 세력에 항복했으며, 카베냑 장군이 감옥 속의 노동자를 3천명 이상이나 학살한 사태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냈다. 맑스는 1850년대에 출판한 <프랑스의 계급투쟁>에서 프랑스 노동운동의 첫 봉기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2년 후 <루이 보나파프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맑스는 그 패배의 결과에 대해 그것은 초라한 나폴레옹 가무노가 그의 12월 정변 도당에 호감을 갖고 있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권력을 포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프랑스 상황을 분석한 위의 두 논문은 젊은 지식인의 작품으로 당시 유럽의 정치·경제·철학을 연구하는 데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동시에, 독일 연방의 산업이 후진적이었으므로 영국·프랑스 노동운동과 연결해서만 발전할 수 있었던 독일 노동운동의 초기 경험이 이 논문들에 반영돼 있다. 독일이 사회·경제적으로 낙후됐다는 사실과 독일이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 지적으로 앞섰다는 사실 사이의 모순은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 변혁에 매우 중요한 것이 됐다. 프랑스 계몽사상이 영국 철학을 압도한 사실은 수십 년 후 독일 고전 문학과 관념 철학이 프랑스의 지적 분야를 앞서게 된 것과 동일한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 발전이 유럽 부르주아지의 지적 활동을 꽃피게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 줬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전반에 독일 노동운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맑스와 엥겔스를 1848년의 혁명적 봉기 전야에 전유럽 노동자들의 의식과 이데올로기의 이론가로 만들 수 있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을 초월한 무계급 사회를 공식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1830년 혁명이나 영국의 사회적 소요 사태와 같은 당시 독일의 마지막 사건이었던 함바흐 페스티발 이후 수많은 민주적 지식인들이 독일에서 쫓겨났다. 이들 중 괴팅겐 대학의 교수인 테어도어 슈스터와 야곱 베네테이가 있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온 기능공들과 함게 파리에서 일하면서 프랑스의 혁명적 민주주의 비밀 단체의 방침에 따라 직인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836년 망명자동맹이 의인 동맹으로 바뀌었다. 계절회가 조직한 기습 공격이 실패하자 몇몇 독일인은 런던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1840년 그들은 런던에서 독일노동자교육협회라는 합법적인 공개 토론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공산주의노동자교육협회가 됐다. 재단기능공 빌헬름 바이틀링은 이 협회에 관해 <현종과 당위의 인간> (1838년)과 <조화와 자유의 보증> (1842년)이라는 두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에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이상향적 환상과 혁명적 교육 독재에 관한 계획이 결합돼 있다. 런던노동자교육협회는 프랑스의 혁명적인 정치적 비밀 모의와 영국의 공개적인 투쟁을 결합시키는 계기를 가져다 줬다. 엥겔스는 1843년 11월에 이 협회와 손을 잡았으며 맑스는 1845년 런던을 지나던 중 이 협회를 방문했다. 1847년 맑스가 파리에서 브뤼셀로 이주한 후 브뤼셀에도 독일노동자협회가 생겨났다. 브뤼셀과 런던의 망명 사회주의자들은 바이틀링이 예시한 감상적 사회주의를 새롭고 더 구체적인 사회주의로 바꿔 놓았다. 의인동맹은 엥겔스의 논문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가 노동자의 상황 분석으로서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알게 됐으며, 맑스의 <임노동과 자본>에 관한 강의와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반대하는 맑스의 논쟁 등이 단순한 도식주의를 넘어서 사회에 적합한 경제 이론을 발전시키고 확대시키는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결과 1847년 여름 런던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협회는 이제까지의 소반란 위주의 비밀 단체에서 선전 단체로 탈바꿈했으며 이름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바꾸었다. 1847년 말 이 동맹의 제 2차 대회에서 강령의 초안은 이미 엥겔스가 작성했지만 강령을 작성하는 데 맑스를 초청하는 등 다음 단계의 조치를 취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8년 2월에 <공산주의 선언>이 발표됐다. 당시 이 선언은 소량만 배포됐을 뿐, 2월 혁명의 진행 과정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삼십 년도 지나지 않아 그 선언은 전세계 노동운동의 강령이 됐다. 선언은 유물 사관 이론을 개괄했으며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요약하고 있다. 맑스가 주장하는 노동자의 임무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 속에서 노동자들이 각자의 나라에서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혁명 과정을 가속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선언은 1848년부터 유럽 노동운동의 강령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돼 나타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로 끝맺는다. 해럴드 라스키는 선언 100주년 판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공산주의 선언>만큼 아온 이후에 논증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는 놀라운 기록은 인류 역사상 거의 없다. 발표된 지 이미 한 세기가 흘렀건만 어느 누구도 그 중요성을 진지하게 논박하지 못하고 있다.

<공산주의 선언>은 혁명 전야에 나타나 혁명을 예견하고 혁명을 위해 노동자의 길라잡이가 되려 했다. 혁명은 패배했다. 프랑스의 계급투쟁으로 유럽 전역의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목적을 버리고 반동 세력의 품안으로 피신했다.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회원들-브레스라우 빌헬름 볼프, 쾰른의 <신라인신문> 편집자인 맑스, 그리고 바덴 봉기의 엥겔스-이 극단적 부르주아 급진파들과 손잡고 이에 대항했다. 오로지 베를린의 슈테판 본의 노동자형제회만이 노동자의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 가능성에 기대를 주었지만, 운동의 전체적인 성격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운동의 결과에도 영향을 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신라인신문> 그룹의 혁명적 전투성과 전략적 우월성은, 어느 정도 완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공산주의자동맹의 이념을 간직하고 있던 빌헬름 립크네히트나 라쌀레 등과 같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쳐 다음 단계의 운동에 도움을 줬다.
혁명의 패배로 동맹의 핵심 성원들은 또다시 망명의 길을 걸어야 했다. 1850년의 호황으로 새로운 혁명의 희망은 무산됐으며, 처음에는 동맹의 통일성이, 나중에는 동맹의 실질적 존립이 무너졌다. 빌리히와 샤퍼는 다시 비밀 모의 시절로 생각을 되돌렸으나 런던의 대다수 중앙위원들은 그 같은 환상을 완전히 배격하고 맑스와 엥겔스한테 가담했다. 프러시아 경찰의 박해를 받아 1852년 쾰른 공산주의자들이 재판을 받게 되자 동맹의 조직적 지속성은 끝장나고 말았다. 1854년 7월 13일 비스마르크의 프러시아 대표가 독일 의회에서 모든 노동자 단체를 금지시키는 법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독일 노동운동사의 첫 장은 막을 내렸다. 1848년과 1849년 사이의 독일 혁명 과정에 대해 당시 가장 탁월한 설명과 분석을 한 논문은 엥겔스의 <독일의 혁명과 반혁명>이다.

노동운동은 영국에서 비롯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곧 비슷한 경향이 나타났으며, 1847년 경제 공황의 결과로 유럽을 휩쓴 1848년의 혁명적 파도가 그 절정을 이루었다. 서서히, 그리고 많은 모순들을 통해 노동운동은 그 독자적인 사상과 행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독자적 사상과 행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상을 그 논리적 귀결까지 이해하려는 노력과 그것을 경제 문제에 적용하려는 노력, 그리고 초기 산업화와 잇따른 공황으로 형편없이 열악해진 생활조건을 극복하려는 노력 등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한 정치적 행동은 협동조합이건 노동조합이건 거의 언제나 일부 노동자들이 시도했으며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이 주도했다. 협동조합과 노동조합만이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지속적으로 독자적인 노동자 의식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조합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은 주로 더 높은 수입으로 교육 기회가 많은 숙련공들이었다. 다른 한편, 점점 가난해지는 노동자들은 공황기에만 자신들의 전투성과 생명력을 표현할 수 있었다. 비록 당시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조력자였지만 18세기 전후의 기계 파괴 운동이나 1830년 파리에서와 같은 역사의 교차점에서는 그들은 비길 데 없는 자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비록 작은 조직에 불과하더라도 독자적 조직이 확고한 정치적·사회적 신념을 갖고 조직되고 그것이 대중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줄 수 있게 될 때 이 모든 것은 변해 버린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독자적 혁명이 실패하고, 1848년에 산업이 낙후된 독일에서 부르주아들이 주도한 혁명적 봉기가 패배했다는 사실은 파리의 "6월의 날들"에서 명확해졌다. 1850년의 호황으로 유럽은 다시 한번 세력의 안배에 성공했다. 동시에, 노동운동이 살아남은 곳에서는 항상 국제적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의식이 상기됐다. 이러한 의식은 유럽이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듯이 혁명 전의 상태로 재정립될 수는 없는 것이며 새로운 상황에서 노동자 역사의 새 시대가 열린다고 하는 새로운 신념으로 굳어져 갔다. 노동자의 물질적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특권을 타도해 평등 사회를 만든다는 사회민주주의 목표는 모든 노동자들의 공동 자산이 됐다. 국제적 협력은 그것의 명백한 필연적 결론이다. 유럽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현존하는 국가와 제휴하기 위해 자신들의 계급적 결속을 포기하고 있을 때도 노동자들의 이러한 정신은 살아 있었다. 노동자 국제주의는 국가 간의 경쟁으로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것과 병행해 갔다.
이렇게 해서 유럽 노동운동사의 첫째 시기는 1850년의 번영이 예고한 새로운 산업화의 물결에 따라 나아가야 할 노동운동의 발전 기반을 형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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