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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평의회에 대한 두 가지 도구적 입장 : 그람시와 막스 아들러

현장연대 2003.11.29 17:16 조회 수 : 1704 추천:36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두 가지 도구적 입장 : 그람시와 막스 아들러


생산양식과 시민사회, 시민사회와 정치 사이의 분리를 지양하기 위한 역사적 경험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노동자평의회의 역사이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자계급의 자생적인 혁명적 운동의 대표적 조직형태이다. 오스트로-맑스주의(austro-marxisme) 좌파의 가장 탁월한 이론가인 막스 아들러는 노동자평의회의 기원을 노동조합의 부재 또는 저발전에서 찾는다. 노동자평의회의 최초의 형태이자 동시에 러시아적 형태인 소비에트는 노동자의 조합적, 정치적 조직이 저발전된 러시아의 후진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저발전된 상태에서 혁명적 상황이 벌어지자 노동조합의 역할을 대신할 노동자평의회가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막스 아들러의 이러한 설명은 러시아의 경우에는 적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일반화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러시아혁명 이후의 대부분의 노동자혁명에 있어서 노동자평의회는 자본주의적 기구화되고 관료주의화된 기존의 노동조합을 대체하면서 증장하기 때문이다.
막스 아들러 자신도 다른 한편으로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와 정당의 의회주의의 자본주의적 대립구도에 대한 부정으로 노동자평의회가 등장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즉, 그는 노동조합의 관심이 즉각적이고 세부적인 문제에만 국한됨에 따라 사회주의는 일종의 민중적 사회보장의 관료적 형태가 되어버린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당의 의회주의는 진정한 정치적 활동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을 도외시하고 이에 따라 모든 정치활동은 의원들에게만 한정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와 정당의 의회주의에 대한 반립물로서의 노동자평의회가 민중지배로서의 민주주의의 부활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도 또한 1919년 10월11일에 쓰여진「노동조합과 평의회」라는 사설에서 당시 서유럽의 노동조합은 자본에 의해 지배되던 역사적 시기의 노동자조직이라고 한 뒤, 노동자평의회는 자본의 노예로서의 임금노동자들의 조직인 노동조합을 대체하고 들어선 것이라고 한다.
노동자평의회는 정치와 경제의 자본주의적 분리 또는 생산양식, 시민사회, 정치의 자본주의적 분리를 부정하는 노동자들의 자생적 조직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평의회는 동시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구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렇지만 혁명운동에 있어서 특히 당과의 관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정황에 따라 노동자평의회의 위상은 달라진다. 또한 지식인 이론가들은 각각의 이론적 입장에 따라 노동자평의회의 위상을 상이하게 평가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에 따를 때 평의회는 새로운 국가의 중심기구가 되어야 한다. 그는 “혁명의 개념은 새로운 유형의 국가, 즉 노동자 ∙농민 평의회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의식적 과정을 지칭한다.”고 하며,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구체적 형태는 평의회들 또는 그와 유사한 조직들의 권력이다”고 한다. 그는 또한 “공장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모델을 구성한다” 고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람시의 체계에 있어서 새로운 국가의 모든 권력이 평의회조직의 권력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사실은 평의회가 오히려 교육과 규율화(discipline)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때 교육과 규율화의 주체는 정당이다.
그람시는 새로운 국가의 권력을 세 가지 층위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제시한다. 즉, “기업위원회를 중심으로 하여 공장내부에서 조직되는 경제적 생활의 프롤레타리아적 형태”와 구역별, 지역별로 조직되는 정치적 생활의 형태 그리고 이 형태들을 접합시키는 사회주의 정당이 그것이다. 이때 지배적 역할을 맡는 것은 물론 정당이다. 그람시는 “당은 계속하여 꼬뮌주의적 교육의 기관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한다. 그는 노동자들의 조직들을 “노동자계급 전체를 흡수하고 규율화시킬 수 있는 유연하게 접합된 방대한 체계로 질서지워야 한다”고 하고 있는데, 이때 이처럼 질서짓는 주체는 정당이다. 예컨대 그람시는  “구역위원회는 그 구역에 거주하는 모든 노동자계급의 발로(émanation)이자 규율을 준수하게 할 수 있는 영향력있고 합법적인 발로이다” 고 한 뒤, “구역위원회들은 사회주의 정당과 직업연합체들의 통제와 규율에 예속된 도시위원회로 확대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덧붙이기를  “노동자민주주의의 이러한 체계는 [---] 대중들을 구조화하고 영구적 규율을 부과할 것이며 [---] 마지막 인물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을 틀지울 것이다”라고 한다. 마지막 인물에 이르기까지 당의 규율에 의해 틀지워진 이러한 사회는 그야말로 숨막히는 일종의 병영사회가 아니겠는가? 당의 규율에 예속된 망상적 조직이 마지막 인물의 사적 생활까지 지배하게 이른다면 그 결과는 끔직한 전체주의적 사회가 될 것이다.
물론 그람시는 당의 규율이 권위주의적으로 부과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규율이 권위주의적으로 부과되지 않을 수 있도록 보장할 아무런 장치도 없다. 오히려 ‘비권위적’이라는 상징적 폭력이 존재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람시에 따를 때 규율은 “가장 의식적인 요소들에 의한 부단한 선전과 설득의 작업에 의해” 전파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적 강제가 아니겠는가? 이른바 의식화된 자가 의식화되지 않은 자를 지배하게 되고 인격적 동등성은 의식화의 수준의 차이에 의해 파괴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의식화의 일면성이 드러나면서 의식화된 자 마저도 자신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위선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람시는 의식화되는 내용이 진리라는 근거하에서 이러한 상황을 정당화한다. 즉, 그람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말하면서  “진리를 언표하고 모두들 같이 진리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꼬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행동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가 또 다른 하나의 진리를 억압할 때, 내가 획득한 진리가 타자의 진리에 의해 억압될 때, 타자가 하나의 한정된 진리를 나의 삶의 총체성의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나에게 부과할 때, 자립적 개인성 또는 개인의 주체성은 유린되게 된다.  
그렇다면 그람시는 자신의 진리 그 자체에 헌신하고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는 데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화된다. 그람시는 당시의 노동운동의 전개에 대해 “이러한 분산되고 혼란된 에너지들에게 하나의 형식과 영구적 규율을 부과하고 그리하여 이 에너지들을 통합시키고 정향화(定向化)해야 한다”고 한다. 왜 그다지도 그람시는 규율에 집착하는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의 1905년 혁명에 있어서 “계획과 도식에 따라 전개되는 정돈되고 규율화된 전투”를 요구했던 러시아 사회민주당 지도부를 비판하면서 “역사는 미리 설정된 도식을 사랑하는 관료주의자들을 조롱한다”고 하며 “겉보기에 혼란되어 보이는 파업은 조직을 구성하기 위한 참다운 작업의 출발점을 이룬다”고 한다. 룩셈부르크에 따를 때 노동자운동의 자생적 형태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도식화된 틀을 부과하려는 지식인들은 상상적인 것이 현실에 우선하는 엄격한 의미의 편집증 환자로 규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람시는 도식적 진리를 부과하기 위해 규율에 집착하는가? 그람시의 진리는 숨겨진 또다른 진리, 즉 진리의 진리를 갖고 있는 데, 그것은 곧 생산, 즉 자본주의적 경쟁을 위한 생산이다. 즉, 그람시에게 있어서 규율은 생산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고, 노동자평의회는 정치기구로서의 당에 복속된 생산의 기구로 간주된다.
  이미 보았듯이 그람시는 노동자평의회를 임금노동자의 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의 대립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이 임금노동자의 조직이라고 할 때 노동자평의회는 ‘누구’의 조직인가? 이에 대해 그람시는 단호하게 노동자평의회는 ‘생산자’의 조직이라고 말한다. 그람시는 노동자평의회의 네 가지 기능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기능들은 모두 노동자에 의한 기능이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기능으로, ① 노동자에게 생산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지우고, ② 노동을 개선토록 하고, ③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규율을 확립하고, ④ 생산자와 역사적 창조자로서의 정신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람시는 덧붙이기를 “노동자는 스스로를 노동체계 전체로부터 분리불가능한 부분으로 파악할 때에만 스스로를 생산자로 파악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하나의 단위로 간주된 공장이라는 세포로부터 출발하여 노동자는 민족에 이르기까지의 항상 보다 넓은 단위들의 이해에 이르게 된다”고 하고, “바로 그때에야만 노동자는 진정한 생산자가 되는데, 왜냐하면 공장에서 민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의 생산과정에서의 자신의 기능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고 한다.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들어선 새로운 사회구성체에서 노동자가 전체 생산과정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은 기본적인 것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람시는 노동자가 생산자로서의 자기의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부단히 강조한다. 그람시는 노동자에게서 그의 총체적 개인성을 보기 보다는 그에 대한 단 하나의 규정성으로서의 생산자의 성격만을 보고자 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람시는 「노동조합과 평의회」 본문 첨부
에서 “특정 직업의 작업팀은 계급의 동질적 몸체로부터 분화되는 느낌을 갖지만 동시에 규율과 질서의 체계 속에 삽입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 규율과 질서의 체계는 그 엄격하고 세부적인 기능에 의해 생산의 발전을 가능케 한다”고 한다. 그람시가 이 문장에서 실제로 생산의 발전을 규율과 질서의 체계의 목적으로 삼고 있음은 그의 다른 글들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그는 「대도시의 역사적 기능」에서는 “이탈리아의 경제적 피폐상황과 천연자원의 부족은 권력을 잡은 후 프롤레타리아가 생산성 발전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할 것을 요구한다”고 한 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생산기구를 장악할 노동자ㆍ농민 평의회가 노동자계급의 독재의 기초를 구성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그는 「공장노동자」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는 “노동자계급은 스스로를 공장과 동일시하고 생산과 동일시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을 사랑하고 기계를 사랑한다”고 한다. 급기야 「노동자계급, 생산의 도구」라는 직설적 제목의 사설에서는 소련으로의 이탈리아 노동자의 수출을 찬양하면서 “노동자계급은 산업생산의 가장 완벽한 도구가 되었다. 그들은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생산의 도구이다. 피아트 공장의 노동력은 유럽과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생산수단이다”라고 말하기까지에 이른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람시가 이 문장에서 노동자가 생산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찬양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람시에게 있어서 임금노동자의 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에 대립되는 노동자평의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생산자란 바로 생산의 도구임을 알게 된다.
그람시에게 있어서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평의회에 대해 말하면서 주체적 자주관리 또는 생산현장에서의 민주주의를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오직 생산조직으로의 평의회에 대해서만 말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평의회의 중요성은 생산력 발전의 필요성과 맞닿아 있다. 그의 평의회 논의는 생산주의적이다. 그리고 그람시가 요구하는 생산력 발전은 경쟁의 논리에 의해 매개된 것으로, 맑스가 말했듯이 “하나의 외적인 강제적 법칙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의 법칙을 부과”받는 것이다. 그람시는 「노동의 도구」라는 사설에서는 사회주의는 공장평의회를 통한 기술교육과 정보교환을 통해 생산력이 발전하는 반면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비생산자가 늘어나서 생산성이 낮아진다고 한다. 결국 사회주의국가가 생산성이 높기 때문에 우월하다는 그람시의 입장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입장이다. 그람시는 이행을 존재론적 전환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람시에 있어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존재론적으로 연속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자본의 논리로부터 해방은 동시에 생산력을 해방시켜 인류에게 진정으로 유용한 기술들이 개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립적 개인성의 발전이 아닌 생산의 발전을 목적으로 삼는 그람시적인 전도된 사고와는 존재론적으로 단절할 것을 요구한다.
평의회 체계를 노동자의 자치적 기구로 간주하기 보다는 생산력 발전의 수단으로 간주했던 그람시는 그 필연적 귀결로,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페렌치 페허가 레닌주의적 사회구성체의 특질로 지적한 것처럼, 공장조직 그 자체를 사회의 모델로 제시한다. 그람시는 「공장노동자」라는 사설에서는 노동자의 입을 빌려 “공장노동자가 질서와 방법과 정밀함을 필요로 하면 할수록 그는 세계 전체가 거대한 공장과 같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점점 더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는 공장노동자의 이러한 성격이 공장노동자들 “꼬뮌주의의 챔피언”으로 만든다고 하며 “인류사회를 갱생할 임무가 그에게 체화된다”고 한다. 그는 「공장평의회」라는 사설에서는 꼬뮌주의적 사회란 “거대한 산업공장의 기초위에 그리고 거대한 산업공장의 모델에 따라 세워진 사회”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결국 그람시는 러시아 혁명에 있어서 쟈코뱅적 분파가 새로운 사회관계의 모델로 공장의 모델을 택했다는 페렌치 페허의 말을 이번에는 이태리의 사회주의운동이라는 무대 위에서 실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람시가 노동자의 개인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오로지 생산자로서의 노동자에 대해서만 말을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람시에게 있어서 노동자란 생산산의 부품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람시는 “노동자가 자신의 동료에게 그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느낄 때 그는 유기적 몸체의 세포가 된다”고 한다. 이 “유기적 몸체의 세포”란 바로 생산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람시 스스로도 자신이 그러한 유기적 몸체의 세포가 되기를 원하겠는가?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는 오로지 꼬뮌주의를 위해서만 생산을 향상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꼬뮌주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적어도 노동자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람시의 꼬뮌주의는 노동자을 한 명의 총체적 개인이 아니라 공장처럼 조직된 사회의 한 톱니바퀴로서의 생산자로 환원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람시는 칸트로부터도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 것인가?
그람시는 「사회당의 혁신을 위하여」라는 사설에서 “사회당의 의무는 모든 대중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자신의 명령을 대중 전체가 받아들이게 하고, 대중 전체의 완벽한 신뢰를 획득하여, 대중의 안내자이자 사고하는 두뇌가 되는 것이다”고 한다. 그람시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자의 자치기구가 아니다. 노동자평의회에는 오직 생산기구의 역할만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람시에게 있어서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와 정당의 의회주의의 자본주의적 대립구도를 지양하고 들어선 것이 아니다. 그람시의 체계에 따를 때 노동조합과 정당의 그러한 자본주의적 대립구도는 ‘생산의 도구’로서의 노동자평의회와 ‘사고하는 두뇌’로서의 정당 사이의 레닌주의적 대립구도에 의해 대체되었을 뿐이다. 레닌주의적 사회구성체에서 노동조합은 그나마 시민사회적 주체성마저 잃게 되고 노동자들은 사적 공간마저 압살 당하게 되었으니 그러한 그람시적 구상은 명백히 퇴보적인 것이다. 레닌은 1919년 뮌헨에 세워진 평의회 공화국에 대해 “여러분들은 6시간의 노동시간과 더불어 국가경영의 기술을 공부할 2-3시간을 설정하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그나마 레닌은 그람시에 비하면 얼마나 노동자와 가까이 있는가!
막스 아들러도 『신질서』(L'ordine nuovo)의 그람시와 마찬가지로 1919년에 노동자들의 평의회 운동에 대면하여 평의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민주주의와 평의회체계』라는 팜플렛을 통해 제시한다. 막스 아들러가 속해 있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이웃 국가들과의 경제적 연관관계의 단절이 초래할 경제적 파탄을 두려워하여 평의회 공화국의 수립에 반대한다. 평의회 운동에 대한 막스 아들러의 입장은 사회민주당의 이러한 판단의 틀 내에 위치한 것으로 일정한 이중성을 갖는다. 즉, 막스 아들러는 평의회 운동의 자생성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평의회 운동이 사회민주당의 노선에 복속되기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기묘하게도 그는 평의회의 성격이 단지 투쟁기구로 국한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평의회체계』에서 막스 아들러는 평의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서두에서 “노동자평의회들은 사회주의적 계급투쟁의 단순한 새로운 형태에 불과한 것이어야만 한다. 노동자평의회들은 이 유일한 임무에만 한정되어야 한다. 노동자평의회들을 새로운 사회의 지속적인 제도로 간주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고, 다시 이 팜플렛의 뒷부분에서 “그러나 노동자평의회의 제도는 혁명적 투쟁이 한 형태일 뿐이다. 노동자평의회의 제도를 지속적인 입헌적 제도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고 반복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막스 아들러가 평의회가 투쟁의 기구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사회주의적’또는 ‘혁명적’이란 수식어를 ‘투쟁’이란 단어 앞에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곧 막스 아들러가 평의회의 투쟁이 사회주의적이거나 혁명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민주주의와 평의회체계』에서의 평의회에 대한 논의의 서두에서 막스 아들러는 원리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노동자평의회는 그들이 사회주의의 어떠어떠한 경향에 정치적으로 속하든지 상관없이 공장의 모든 노동자들을 대표한다”고 하고, 평의회의 발생과 더불어 “더 이상 정치적 행위와 조합적 행위의 구분이 사라지고” 따라서 “모두들 행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치적 행위와 조합적 행위의 분리를 지양하는 평의회를 제도화하기를 거부하는 막스 아들러의 입장은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게다가 아들러는 노동자평의회는 정치적 경향에 상관 없이 모든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원리적 입장을 곧 바로 부정하는 것이다.
즉, 막스 아들러는 대중의 정치적 성숙의 결여를 지적한 뒤에 “일하는 자들이 평의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노동자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다. 그들은 계급의 사회주의적인 투사여야 한다”고 하고, 그래서 “노동자평의회는 오히려 사회주의적 평의회라고 불리워야 할 것이다”고 한다. 막스 아들러는 노동자평의회의 자생성을 부정하면서 사회주의의 틀 내에 가두어 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를 때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대중들의 자생적 운동에 평의회를 맡겨놓을 경우 평의회는 동업조합적 또는 직업적 조직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현존사회의 해방의 형태를 동업조합적 변형으로 대체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막스 아들러에 의하면 오로지 사회주의만이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가 동업조합적으로 분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즉, 그는 “이 자주적 조직이 동질적 성격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주의적 이념이 개입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한다.
막스 아들러는 사회주의를 루소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를 일반의지의 실현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의지의 실현수단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평의회는 내부적 분열이 없는 동질적 성격이어야 한다. 막스 아들러에 따를 때 평의회 체계의 결정적 이점이란 “동질적인 대표체계의 창조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권력을 노동자평의회와 농민평의회로! 그것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념이다. 그러나 이 이념이 사회주의에로 이르기 위해서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우선 계급적 동지라는 동질적 인민을 구성해야 한다.” 막스 아들러에게 있어서는 노동자평의회와 농민평의회가 국가기구를 대체하고 권력을 장악한 상태는 아직 사회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해관계가 평의회 간에 분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를 때 사회주의는 동질적이어야 한다. 마치 한국의 지배계급들이 ‘국론분열’을 싫어하듯이, 막스 아들러의 사회주의적 사회란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질적 사회이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자와 농민들이 동질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스 아들러는 “타자의 노동을 통해 이득을 얻던 모든 자들을 배제한 채 오로지 노동계층들에 의해서만 선출된 노동자평의회들은 각각의 기초적 단위들의 동질성을 회복시켜주고 따라서 실질적인 일반 의지의 형성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러에 따를 때 노동자평의회가 동질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동일한 사회이론의 매개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때 동일한 사회이론이란 물론 사회주의이론이다. 따라서 이미 보았듯이 아들러는 평의회에는 사회주의자만이 참가해야만 한다고 하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적인 대의체제로서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하는 평의회와 비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하는 국회의 이중적 대의체제를 제시한다. 이러한 이중적 대의체제에서 평의회는 사회변혁의 진정한 일반의지를 표상하고 국회는 프롤레타리아독재가 러시아에서와 같이 테러리즘화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점차로 전파됨에 따라 국회의 중요성이 점차로 감소되어 끝내는 소멸되기에 이르고, 그리하여 사회 전체적으로 루소적 일반의지가 구현된다는 것이다. 막스 아들러는 “노동인구의 가장 다양한 계층들의 완전한 대의(代議)가 마침내 실질적인 일반의지를 구성할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실질적인 일반의지’란 과연 ‘어떠한’ 일반의지일 것인가? 우리는 막스 아들러가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자생성을 부정하고 평의회운동이 사회주의에 의해 매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평의회를 통해 표상되는 일반의지란 노동자계급의 일반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의 일반의지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회주의의 일반의지란 결국 막스 아들러의 의지가 아니겠는가? 막스 아들러의 이론에서 사회주의는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노동자계급에 대립한다. 현실정치에 있어서도 막스 아들러는 평의회 공화국의 설립을 요구하는 노동자계급의 의지를 무시하고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자신의 ‘사회주의’의 틀 내에서 유지시키려고 한다. 결국 아들러적 인 사회주의적 동질성이 실현된 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은 알뛰세르가 말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호출된 주체가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모두들 사회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사회주의의 꼭대기에는 당이 이데올로기를 전하하며 지배하지 않겠는가? 아들러의 사회주의는 생산양식의 진리를 착취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일반의지’란 사실상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그 신화는 사회전체를 자신의 의지에 복속시키려는 특정한 지식인집단의 편집증의 투사물이다. 일반의지는 자립적 개인의 주체성에 대립한다. 자립적 개인의 주체성이란 곧 개인의 내면적 고유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의지는 개인 속에 내면적 고유성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스스로가 차지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개인을 내면이 제거된 자동인형으로 만들려고 한다. 동유럽 레닌주의적 사회구성체들에 있어서의 노동자혁명운동사는 페렌치 페허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그러한 내면적 고유성의 억압에 반발한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혁명의 과정 속에서 “건전한 공적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민주적 장치들”인 언론의 자유, 결사와 집회의 권리가 불법화된 것을 비판하면서 “오로지 정부의 지지자들을 위한, 오로지 당원들을 위한 자유는 비록 정부의 지지자들과 당원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여도 결코 자유일 수 없다. 자유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자들의 자유이다”라고 말한다. 즉, 내면적 고유성에 입각한 주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사회는 그 지배양식의 측면에 있어서 이데올로기가 문화를 복속시킨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노예제 사회의 특질을 갖는다. 일반의지는 내면적 고유성에 입각한 주체성에 대립한다. 따라서 일반의지란 타자의 내면적 고유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데올로기적 강제의 또다른 이름이다.
민주주의란 어원에 따를 때 민중의 지배이다. 꼬뮌주의란 민중의 지배를 실현하는 평의회기구들의 기초적 접합단위이다. 꼬뮌주의 사회에서 공적 공간의 구성원리는 모든 층위에 있어서 타자의 사물화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존재론적 정의의 원칙’에 한정된다. 즉, 그 공적 공간은 오로지 존재론적 정의의 원칙에 의해 규제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 공간들은 내면적 고유성에 입각한 주체성 또는 주체성들 간의 협의에 의해 움직여질 뿐이다. 평의회기구는 생산현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적 공간에 있어서 존재론적 정의의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구이다.
맑스는 꼬뮌주의적 혁명은 부르주아적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 국가 기구를 파괴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 국가기구 속에 이미 부르주아적 지배관계가 관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민사회의 심층에 침투하고 있는 그 국가기구는 오로지 아래로부터 서서히 붕괴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는 오직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평의회운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자신의 이중적 담화 속에서 한편으로 막스 아들러는 노동자평의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란 곧 민중의 자주적 결정의 기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민중의 자주적 결정이란 사회주의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민중 자기 자신에 의한 결정이다. 또한 막스 아들러는 혁명의 기구로서의 평의회에 의한 행정기구의 대체와 파괴는 이미 혁명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만약 노동자평의회가 행정관청을 대체하기에 이르거나 또는 어떠한 중요한 결정도 노동자평의회 없이 또는 노동자평의회에 반대하여 취해지는 것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혁명이다”라고 한다. 문제는 그 혁명이 진정한 노동자의 혁명이라면 어떠한 외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도 매개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평의회가 오직 노동자들 자신의 주체적 평의회일 때에야만 노동자평의회에 의한 국가기구의 대체가 노동자들의 혁명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노동과정에서의 자신들의 사물화에 대한 필연적 반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존재론적 정의의 원칙을 공적 관계의 규제원리로 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막스 아들러가 노동자평의회의 자생성을 비판하는 것을 보았다. 그에 따를 때 노동자평의회의 운동에 사회주의자가 개입하지 않으면 평의회 조직은 중세적인 동업조합적 조직으로 후퇴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토지는 농민들에 의해 소유되어야 하고 공장은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소유되어야 한다”는 평의회의 요구를 비판한다. 평의회의 이러한 요구가 사회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그것은 결코 토지와 공장에 대한 그러한 방식의 소유는 사회에 의한 전유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토지와 생산수단의 사회화의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이란 과연 무엇인가? 막스 아들러가 말하는 ‘사회에 의한 전유’란 결국 그 사회의 권력집단에 의한 실질적 소유를 뜻할 뿐이다. ‘사회’라는 용어가 하나의 동질적 실체를 뜻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언제나 사회적 지배와 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주장이다.
샤를르 베뜰렝은 소유관계에 대한 맑스의 이론을 정리하면서, 맑스가 사유재산의 폐지를 거론하였던 것은 『공산당 선언』의 단 하나의 텍스트에서만이며, 맑스의 나머지의 텍스들에서는 오직 부르주아적 소유형태의 폐지만이 문제 삼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맑스에 따를 때 부르주아적 소유란 임금노동자의 착취를 가능하게 해주는 사회관계들의 합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자본가 개인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뿐만이 아니라 주식회사 소유와 국가소유도 이에 포함된다고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맑스는 예컨대 『그룬트리세』에서 루이블랑(Louis Blanc)의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고,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정점”이라고 말을 한다. 맑스는 『자본론』1권에서 미래의 꼬뮌주의 사회에 대해 “공동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노동하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그 새로운 소유관계에 대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상응하는 자본주의적 전유는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노동의 상관물이었던 그러한 사적 소유에 대한 첫 번째 부정을 구성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의 변전을 지배하는 숙명에 의해 스스로에 대한 부정을 스스로 산출한다. 그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그 부정의 부정은 노동자의 사적 소유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시대의 획득물에 기초한, 협업에 기초한, 토지를 포함한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기초한 노동자의 개인적 소유를 복원한다”고 한다. 황태연은 『환경정치학과과 현대정치사상 』에서 맑스의 바로 이 텍스트에 입각해서 꼬뮌주의적 소유는 소유에의 개인적 권리를 철폐한 ‘동물적 공산주의’의 집단소유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루카치의 제자들인 아그네스 헬러와 페렌치 페허가 자신들의 역사적 체엄에 입각하여 증언하고 있듯이, 막스 아들러가 말하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의 전유’가 노동과정에서의 주체성의 박탈과 그에 따른 (노동자정상의) 노예화를 지양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일반화해버렸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그네스 헬러는 동유럽에서 소유에의 모든 개인적 권리를 국가가 박탈함에 따라 사회는 “임금노동자들의 거대한 집합체”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문제는 존재론적 정의에 따라 노동과정에서 사물화를 탈피하여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 즉 노동자가 자신의 삶의 결정적 층위에서 인간적으로서의 주체성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과정에서의 주체성의 회복의 조건이란 바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일하고 있는 공장을 집합적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집합적이며 주체적인 자주관리는 어떤 ‘초월적인’ 범주로서의 사회에 의한 소유와는 전혀 달리 자신의 공장을 자신들이 직접 관리하고 그 생산활동의 결과를 집합적 소유자들이 나누어 갖는 매우 구체적인 확실한 소유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들러식으로 사회주의라든지 무슨 주의라는 추상적 이념을 개입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 또한 유고에서의 자주관리가 생산 단위간의 경쟁을 격화시켰다는 식의 우려를 제기할 필요도 없다.
“토지는 농민들에 의해 소유되어야 하고 공장은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소유되어야 한다”는 평의회의 요구는 노동자, 농민들 자신의 요구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1919년의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상황은 노동자ㆍ농민의 자생적 평의회 운동과 칼 레너, 오토 바우어, 프리드리히 아들러에 의해 대표되는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 노선이 노동자 상황에서 막스 아들러는 노동과정에서의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동자, 농민들의 요구를 사회주의의 이름하에 억압하고 생산수단의 ‘사회적’ 전유에 의한 노동과정상의 또 다른 노예화를 구상할 뿐이다. 막스 아들러처럼 노동자들의 정치적 미성숙을 우려한다면 노동자혁명을 지지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노동자혁명에 단호히 반대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미성숙을 우려하면서 노동자혁명을 지지하는 것은 일종의 온정주의적 또는 엘리뜨주의적 지배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노동자혁명을 지지한다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실현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토지와 같이 개인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생산단위는 자연스럽게 개인적으로 소유되고 공장과 같은 집합적 생산단위는 집합적으로 소유되는 것은 노동자ㆍ농민 평의회 운동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것은 자생적 평의회가 국가적 행정기구를 대체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자연적 과정이다. 막스 아들러는 농민평의회와 노동자평의회의 대립을 우려한다. 그러나 그러한 대립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될 (일종의 동업조합구조적인) 타협은 이데올로기적 강제에 의해 부과된 아들러적 동질성의 허구성에 비료해볼 때 훨씬 실질적 효과를 갖는다. 막스 아들러는 자생적인 평의회운동이 중세의 동업조합적 운동으로 후퇴할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동질화된 사회는 오직 이데올로기적으로 ‘승화’된 억압적 사회일 뿐이다. 생산단위 내의 가부장적 생산관계의 문제를 일단 사상(捨象)해 본다면, 우리가 앞으로 볼 것이듯이 중세 자유도시의 동업조합적 연합구조는 맑스가 『자본론』의 「미출간 제6장」에서 말했듯이 타협과 약정에 의거한 가장 안정된 공생적 재생산구조이다. 그러한 재생산구조는 경쟁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제동장치를 잃어버린 자본주의적 생산의 파괴성을 중단시킬 것이다.
생산양식의 진리를 착취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주의의 관점에서는 안토니오 그람시와 막스 아들러의 입장을 통해 보았듯이 노동자평의회 자체가 노동조합과 정당의 자본주의적 대립구도를 지양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맑스주의-레닌주의적 관점에서 노동자평의회는 진리의 담지자로서의 당에 예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설정되고, 따라서 노동조합과 정당의 자본주의적 대립구도는 정당에의 노동자평의회의 예속구도에 의해 대체되는 것으로 설정될 뿐이다. 반면 레닌주의적 사회구성체들에서 당에 대한 사적 공간의 예속 또는 노동조합의 예속에 대항하여 전개된 노동자평의회운동은 오히려 맑스주의-레닌주의에 대립한다는 역서적 고유성을 갖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폴란드의 연대노조운동이다.






  < 출처 : 주체성의 이행 / 이종영 / 백의 / 1997 / p.50~70 >
<첨부>
노동조합과 평의회
                                         Antonio Gramsci


노동자와 농민대중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노동연맹(Confederation of Labour)의 지도부로부터, 민주적 의회 국가가 헛되이 헤매고 있는 위기와 그 특성이 비슷한 입헌적(constitutional) 위기를 겪고 있다. 두 경우 모두, 위기는 권력과 지배의 문제이다. 하나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다른 하나에 대한 해결책이 될 것인데, 왜냐하면 일단 자신의 계급조직의 영역에서 권력의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노동 대중은 자기 자신의 국가의 유기적인 골격을 창조하고 의회 국가에 성공적으로 도전하여 이를 전복할 수 있는 입장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조직이 결국 자체의 법칙, 즉 혁명적 계급으로서의 역사적 임무에 대한 의식을 획득한 대중에게는 매우 낯선 조직 구조와 복잡한 작동 메카니즘에 의해 지배되는 법칙에 복종해야 하는 그런 거대한 기구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현존하는 제도적 관료제에 의해서는 결코 그들의 권력의지가 어떤 명확하고 확실한 방식으로도 발현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심지어 자신의 영역, 그토록 고통스런 노력과 끈기를 가지고 피와 눈물로 굳혀 왔던 자신의 본거지에서조차 이들은 기술에 의해 인간성이 말살되고, 관료제가 창조적 정신을 고사시키며, 진부하고 입바른 딜레탕티즘이 산업 생산의 필요에 대한 정확한 관점이 완벽한 부재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심성에 대한 완벽한 이해 결여를 은폐하려고 헛되이 노력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노동자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들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개인의 언어와 의지는 노동조합 기구의 관료제 구조에 내재한 철칙에 비교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다.
조직의 리더는 널리 인지되고 있는 이 근본적인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계급이 근본적이고 진정한 역사적 구조와 양립하는 형태로 조직되지 않고, 계급의 실제 역사발전 과정을 지배하는 내적 법칙에 따라 항상 수정되는 배열(configuration) 속에 통합되지 않는다는 것이 점점 더 명확해질수록, 지도자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맹목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점점 더 순수한 ‘법적’ 방식으로 갈등과 불만을 해결하려 든다.
구제 불가능한 관료들인 이들은, 단지 공허한 수사학적 호소와 왁자지껄한 야단법석에 의해 집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슬로건과 고무적인 연설이, 작업장의 실제 경험에서 발전한 심리학에 뿌리를 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을 바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 이들은 ‘시대의 도전에 대처’하려 하고 있으며, ‘거침없는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고 있고, 노동조합과 소비에트가 얼마나 유사하며, 현존하는 노동조합 조직체제가 공산주의 사회의 틀,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구체적 형태를 취할 배경이 되는 세력간 체제를 이미 얼마나 구성하고 있는지를 반복하면서 이미 낡아빠진 생디칼리즘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상투어를 다시 꺼내 먼지를 털고 있다.
현재 서유럽 국가에 존재하는 형태의 노동조합은 소비에트와는 매우 다른 종류의 조직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 공산주의 공화국 안에서 유례없는 거대한 기세로 발전하고 있는 노동조합과도 매우 다르다.
직업별 조합, 노동회관(Camerce del Lavoro), 산업별 연맹, 그리고 노동총연맹(Confederazione Generale del Lavoro), 이 모두는 자본에 의해 지배받는 역사적 시기에 존재하는 특수한 프롤레타리아 조직 유형을 대표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류의 제도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요소이며, 사적 소유 체제 안에서만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개인들이 재화의 소유 정도와 재산을 교환하는 정도에 의해 가치평가 되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동안, 노동자들 역시 일반적인 필연성의 철칙을 따르도록 강요받아 왔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상품, 즉 그들의 노동력과 직업적 숙련의 거래자가 되어 왔다. 그들이 경쟁의 위험에 노출됨에 따라, 노동자들은 그들의 상품을 보다 크고 포괄적인 ‘기업’에 집중시키고 이 거대한 우시장(牛市場), 즉 노동 집중을 위한 기구를 창조해 냈다. 그들은 임금과 노동시간을 부여하고, 시장을 훈육시켰다. 그들은 시장 상황에 숙달되고 계약서를 작성하며 상업적 위험을 평가하는, 그리고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만한 계획을 발의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고방식을 훈련받은 충성스러운 행정요원들을 외부로부터 고용하거나 혹은 내부로부터 만들어 냈다. 노동조합의 본질적 속성은 경쟁적인 것이지 고안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급진적 혁신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전반적인 산업문제에 관한 기술적 전문가나 숙련된 관료를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제공해 주는 것뿐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개인들을 선발할 시야를 제공하지 못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진보의 리듬, 생명의 약동(elan vital)을 체현할 간부는 노동조합 운동에서 배출되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임금노동자의 조직, 자본의 노예의 조직이 아니라 생산자의 활동과 맞물려 돌아가는 조직 유형에서만 가능하다. 공장평의회는 이런 종류의 조직의 핵이다. 집단을 위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생산물에 대해 각각의 개인과 각각의 노동이 기여한 정도에 따라, 모든 종류의 노동은 평의회 안에서 대표성을 부여받는다. 이것은 평의회가 계급 제도이며, 사회 제도임을 의미한다. 그것의 존재이유는 노동과 산업 생산―노동 분업과 임금같이 일시적이고 결국 우리가 극복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그런 것들이 아닌 영원한 것―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평의회는 노동계급의 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 이는 전체 사회조직 속에서 대중이 취하고 있는 응집력과 형태를 반영하는 어떤 응집력과 형태를 대중에게 부여할 수 있다.
공장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위한 모델이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조직에 고유한 모든 문제는 또한 평의회 조직에도 고유한 것이다. 평의회와 국가 모두에서, 시민의 개념은 동지의 개념으로 대체된다. 효율적이고 유용한 생산을 위한 협동의 경험은 노동자들 간의 연대를 발전시키고 현존하는 동지애와 애정의 관계를 강화시킨다. 모든 사람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며, 모든 사람은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모든 사람은 지위와 역할을 갖는다. 가장 무시당하고, 가장 소박한 노동자라 할지라도, 가장 자만심이 강하고 가장 ‘시민적인’ 기술자라 할지라도, 공장조직의 경험을 통해 결국 이 진실을 깨달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결국 공산주의 의식을 획득하여, 자본주의 경제에 비하여 공산주의 경제가 얼마나 거대한 전진을 보여주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가 노동 공동체 속에서 경험한 생생하고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추출해 낸 새로운 사회정신의 촉진에, 그리고 상호 교육에 가장 적절한 기관이다. 노동조합에서 노동자 연대의 정신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고통과 희생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발전된다. 평의회에서 연대는 긍정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산업생산의 가장 하찮은 계기 속에서조차 명백하다. 그것은 유기적 총체, 즉 사회적 부의 사심 없는 생산과 유용한 노동을 통해 주권을 확인하고 역사를 주조해 나갈 자유와 힘을 실현하는 동질적이고 탄탄한 체제를 형성한다는 거에 대한 즐거운 깨달음 속에서 표현된다.
그러한 조직 ― 노동계급이 통일적이고 생산적인 계급으로 구조화되는 조직, 덕망 있는 간부와 개인들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싹트는 조직 ―의 존재는 노동조합의 구성에서,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에 생기를 불어넣는 정신과 관련하여 근본적이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공장평의회는 노동자들이 종사하는 서로 분리된 작업에 따라 조직된다. 각 작업장 부분(section),마다 노동자들은 작업조(crew)로 나뉘어 지고, 각 작업조는 (직무에 따라 나뉘어 진) 하나의 작업 단위(職場, work unit)를 구성한다. 평의회는 현장에서 직업별, 작업조별로 노동자들이 선출한 대의원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개인들에 기반하고 있는 데 반해, 평의회는 산업 과정의 규율 속에 실현돼 있는, 직업 전반의 유기적이고 구체적인 단위에 기반 한다. 작업조(개별 직종)는 자기 자신이 동직적인 노동계급 속에서 독특한 실체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이 생산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엄밀하고 정확한 역할을 수행하는 규율과 질서의 체제로 통합됨을 깨닫는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해와 관련되는 한, 하나의 직업은 계급의 구성 부분이며, 그것과 함께 존재한다. 계급의 여타 부분과 구별되는 지점은 기술적 이해(利害), 즉 그 직업이 작업하면서 사용하는 특수한 도구의 발전이라는 문제에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산의 완성, 부의 사회적 획득과 분배라는 그 일반적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다양한 산업들은 동질적이고 통일적이다. 하지만 기술 조직과 특수한 활동이라는 지점에서는 각각의 산업이 자신만의 특수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
평의회의 존재는 노동자들에게 생산에 대한 직접적 책임감을 부여한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노동하는 방식을 개선하도록 고무한다. 이는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원칙을 도입시키고, 역사의 생산자, 역사의 창조자라는 심성을 만들어 낸다. 그런 연후에 노동자들은 이 새로운 의식을 노동조합에 이식시키고, 이에 따라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단순한 활동을 넘어, 경제적 삶과 노동의 기술적 현실을 재구성하는,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에 어울리는 경제적 삶의 형태와 노동의 실천을 창조해 내는 근본적인 임무에 자신을 헌신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상의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조합과 최고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은 계급투쟁의 최상의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성립시킬 수 있다. 이들은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그리고 결코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는 객관적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이 러시아에서 지금 산업별 노동조합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의 기관이 되었는데, 그 속에서 해당 산업의 모든 개별 기업은 서로 함께 연결․접합되어 하나의 위대한 산업이라는 실체를 형성한다. 소모적인 경쟁은 철폐되고 행정과 공급, 분배 그리고 저장의 주된 업무는 거대한 센터들로 통합되고 있다. 작업 시스템과 제조 비결, 새로운 응용은 즉각적으로 산업의 모든 개인들의 공동의 재산이 된다. 개별기업과 사적소유 관계의 특징인 훈육적 기능과 다양한 관료제는 엄격하게 산업적인 필요에 의해 요구되는 수준으로 감소된다. 러시아 섬유산업에 적용된 이러한 노조 원리는 관료진을 10만에서 3천5백으로 감소시킬 수 있었다.
공장을 기본 단위로 삼는 조직은 계급(전체 계급)을, 전적으로 산업과정에 적합하며 그 과정을 지배하고 일단 지배하면 영원히 지배할 수 있는 응집되고 동질적인 실체로 통일시킬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전 사회구조에 걸쳐, 그리고 정치적 상부구조내에 존재하는 계급지배를 타파할 공산주의 국가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장 조직 내부에서다.
직업별 노조(trade unions)와 산업별 노조(industrial unions)는 위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육중한 몸뚱아리에서 척추를 이룬다. 이것들은 개인적이고 지역적인 경험을 주조하고, 그 경험을 보다 광범위한 총체로 모아 내며, 노동조건과 생산조건의 전국적 향상이라는 이상을 실현한다. 이는 앞으로 건설되어야만 할 공산주의적 평등의 기초가 된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이런 식의 긍정적인 계급 지향과 공산주의 지향 속에서 운동을 시작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은 평의회 체제의 공고화와 확장을 위해, 그리고 노동계급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정력과 헌신을 투여해야 한다. 공산주의 독재의 모든 상부구조와 공산주의 경제가 솟아나고 발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동질적이고 통일된 토대 위해서다.

<오르디네 누오보>, 1919년 10월 11일

  < 출처 : 옥중수고 이전 / 갈무리 / 2001 / p.171~175 >
폴란드 연대노조운동과 중세자유도시 : 노동자조직의 연합으로서의 국가의 현실성


알랭 바디우에 따를 때 폴란드의 연대노조운동은 노동자계급이 “자기에게 고유한 정치적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한 최초의 예이다. 바디우는 폴란드의 연대노조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노동자계급은 바로 자기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적 몸체 전체의 수준에서 새로운 정치적 사고의 전개의 중심을 구성하였다. 지식인들, 농민들, 도시의 젊은이들은 공장의 민주주의적 조직에 의해 스스로가 보호되고 있음을 인정한다. 정치적 노쟁은 그 실천적 본질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논쟁에 준거한다”고 한다. 바디우에 의하면 “화학적으로 순수한” 노동자운동이었던 폴란드 연대노조운동을 통해 나타난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정치적 능력은 첫째로 부르주아 정치적 능력과는 전혀 이질적이라는 것, 둘째로 맑스주의-레닌주의에 대해 완전히 외재적이라는 것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그리고 바디우에 따를 때 바로 이 두 번째 특징인 맑스주의-레닌주의에 대한 완전한 외재성에 의해 현대사에 있어서 맑스주의와 노동운동 사이의 유기적 연결성이 완전히 해체되어 버린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맑스주의-레닌주의에 대한 연대노조운동의 외재성이 부르주아의 정치적 능력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정치적 능력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부르주아의 정치적 능력은 생산양식과 정치 사이에 시민사회를 설정한 뒤 노동조합을 시민사회에 위치시켜 생산양식과 단절시키고 다시 노동조합과 정당을 분리시키는 이중의 방어능력으로 특징지워 진다. 반면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정치적 능력은 이러한 이중의 방어를 철폐하고 생산양식을 직접 정치화시키는 능력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정치적 능력이 노동자조직 위에 또 다시 정당을 올려놓으려는 맑스주의-레닌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맑스주의-레닌주의의 정당-노동자조직 관계에 의해 매개되는 지식인과 노동자 사이의 지배관계도 물론 노동자의 고유한 정치적 능력에 의해 거부된다. 이 말은 곧 폴란드의 연대노조운동이 정당의 우위 또는 정당과의 대립적 연관이라는 질곡을 거부한 진정한 평의회 운동이라는 뜻이다.
1980년 8월 14일 폴란드의 그다니스크에서 파업이 일어나고 이틀후인 16일에는 MKS(기업ㆍ공장간 파업위원회)가 설립된다. MKS는 그 다음날인 17일 언론ㆍ표현ㆍ출판의 자유 존중, 국제노동협약 실시, 선거에 의하여 ‘모든 정치ㆍ사회분야’의 대표자를 선출할 것, 당 지도자ㆍ경찰의 특권폐지, 사법권의 독립존중 등을 포함한 20개 항목에 가까운 요구사항에 대한 문안이 작성된다. 이 문안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요구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이 문안에 대한 토론과정에서 MKS의 구성원들은 지금이야말로 정부로 하여금 독립자치노조의 결성을 인정하도록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하게 된다. 그리하여 MKS는 21개 항의 새로운 요구서를 작성하여 그 다음날인 18일날 발표하고 그 중 첫 번째 항으로 ‘당과 관리ㆍ경영층으로부터 독립된 자치노동조합의 승인’이 요구된다. 그리고 MKS는 이 요구서에 대한 별도의 성명을 발표하여 “파업이 종결된 후에도  MKS는 해산하지 않고 21개 항목의 요구가 실현되는 것을 감시하며 지방노동조합평의회의 역할을 담당하여 독립자치노동조합의 조직작업에 착수한다”고 선언한다.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벌써 폴란드의 연대노조운동이 당에의 예속관계하에서 제도화된 국가기구로서의 노동조합을 부정하는 운동으로서 평의회운동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MKS의 항구적 기구화는 국가 내의 정당과 노동조합의 관계구조에 대한 근본적 전복을 내포하는 새로운 국가적 기구로서의 평의회체계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폴란드 정부는 연대노조운동의 이러한 출발에 대해 “무책임한 아나키스트들”이란 비판을 행한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란 딱지는 맑스주의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지양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 대해 붙여지는 상투적 문구에 불과한 것이다. 8월 24일의 MKS 전체회의에서는 노동조합의 복수주의를 요구하는 한편 새로운 노동조합의 명칭을 ‘자유’노조에서 ‘독립’노조로 부르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자유’라는 명칭이 당과 국가의 지도‘로부터의’자유라는 부정적인 규정을 내포하고 있는 반면,‘독립’이란 명칭은 새로운 노동조합의 근본적 자주성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 노동자조직이 어떻게 ‘독립적’일 수 있겠는가, 노동자조직의 ‘독립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로 좁혀진다. 노동자조직의 ‘독립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국가에 의해 설정된 정치와 시민사회의 대립적 구도를 벗어난다는 것, 정치와 시민사회와 생산양식 사이의 분리를 벗어난다는 것, 레닌주의의 경우에는 당에의 예속상태를 벗어난다는 것을 그 조건으로 한다. 노동자조직의 독립성은 오로지 노동자조직이 타자의 정치에 복속되지 않고 스스로 정치적일 때에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노동자조직의 독립성은 스스로 자주적인 정치를 행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 폴란드에서 연대노조운동을 둘러싼 논의는 연대노조의 정치성을 중심축으로 해서 전개되게 된다.
8월26일 MKS의 안제이 그비아즈다는 “민주주의를 과시하고 있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없고 아무런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 현실에 위기는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들이 파업에 돌입한 직접적인 이유는 정책결정이 소수 관료들의 수중에 독점되어 있는 비민주적인 상황하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발언한 후, 연대노조가 “참다운 우리들의 대표기관”이 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또한 MKS의 플로비안 브시네프스키는 “현 위기의 주된 원인은 노동자를 대표하는 기관이 없다는 점”이라고 한 뒤 “독립노조의 존재만이 개혁을 완성시켜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요구들은 곧 노동자들의 정치적 주체성에의 요구이다. 기존 국가제도 하에서 정치조직과 노동자조직의 분리 그리고 그에 따른 노동자의 존재의 탈정치화에 대한 지양에의 요구이다. 그러나 연대노조가 노동자들의 참다운 대표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곧 연대노조가 정치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대노조가 정치조직화하는 것은 정당과 노동조합의 분리구조에 입각한 기존의 국가의 틀을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폴란드 정부는 8월27일 너무나도 당연히 “신노조가 정당의 역할을 추구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MKS에 대해 요구한다. 8월29일 간행된 연대노조측의 파업정보지인 『솔리다노스치』제10호는 그다니스크, 그디니아, 소포트 세 도시의 당위원회의 문서를 공개하고 있다. 그 문서에서는 당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연대노조가 야당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어 이중권력의 상태가 벌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왜 레닌주의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당은 노동자조직이 정치화되는 것을 거부하는가? 노동자조직의 정치화에 대한 거부는 노동자들을 대상화해야 할 필요성에 입각해 있다. 주체성은 정치화를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것이고 정치성의 박탈이 노리는 것은 노동과정에서의 주체성의 박탈이다.
1980년 8월31일 18일간의 파업이 종결되고 ‘자주관리에 의한 독립노조’로서의 연대노조가 승인된다. 그러나 이때의 자주관리는 서구의 자주관리보다는 앞서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오직 생산현장에서의 자주관리에만 국한된 탈정치적 형태의 것이다. 즉, 9월24일 당의 지도적 역할에 대한 특별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연대노조의 등록이 거부되기 때문이다. 그 후 10월24일에는 재판부가 일방적으로 정관을 수정하여 연대노조가 등록되고, 또 다시 11월10일에는 본래의 정관을 복구하여 연대노조가 인정되나 당의 지도적 역할을 인정하는 부칙이 삽입된다. 그리고 정부는 방송을 통하여 연대노조의 비정치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 모든 갈등은 연대노조의 정치성을 둘러싼 갈등이다. 1981년 7월17일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제1서기로 선출된 카니아는 당선 직후에 행한 연설을 통해 연대노조를 정치적인 정당으로 만들려는 반동적 세력을 분쇄하겠다고 경고한다. 결국 핵심적인 문제는 항상 연대노조가 경제적 제도의 틀을 넘어서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다.
1981년 9월5일 제1회 연대노조 전국대회에서 연대노조의 창립멤버인 레흐 소비에스자크는 연대노조 정관의 부칙에 들어있는 공산당의 국가지배권을 인정한 구절을 삭제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연대노조의 지도자 중의 한사람인 에드먼드 발루카는 폴란드국민은 연대노조가 폴란드를 정치ㆍ경제적으로 지배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발언한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예속하의 연대노조는 ‘독립’노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주체성은 정치적 독립을 요구한다. 1981년 3월 바웬사는 이탈리아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야루젤스키가 실패하면 연대노조가 정권을 맡겠다고 선언한다. 자, 생각을 해보자. 알랭 바디우는 연대노조운동을 통해서 부르주아적 정치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노동자의 고유한 정치적 능력이 제시되었다고 한다. 연대노조가 국가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노동자조직이 곧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국가가 노동자조직들의 연합 이상의 기능을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국가가 노동자조직들의 연합 이상의 기능을 갖는다면 그 기능은 곧 잉여적 기능, 즉 계급지배를 위한 기능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노동자조직들의 연합 이상의 기능을 가져야 할 필연적 이유란 하나도 없다. 국가의 기능은 바로 노동자조직들의 연합의 기능이면 충분한 것이다. 바웬사가 1981년에 얘기햇듯이, 또는 에드먼드 발루카가 1981년에 얘기했듯이, 또는 1981년 4월의 여론조사에 따를 때 11%의 응답자가 “연대노조가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듯이, 연대노조가 국가가 되었다면 국가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단절이 실현되었을 것이다. 노동자조직들의 연합이 국가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바웬사는 나중에 폴란드의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적 의회주의의 모델에 따라 일정하게 수정된 과거의 국가기구의 대통령이 되었을 뿐이다. 즉, 그는 노동자조직들의 연합으로서의 국가의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었다. 1981년 연대노조운동의 일환으로 자주관리운동이 전개된다. 그 자주관리운동은 기업,단체의 장을 자유선거로 뽑아 운영방침을 결정해 나가겠다는 것으로, 서유럽의 자주관리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크리스 하먼에 따를 때 당시 정부권력은 산업의 80%를 통제하고 있었고 연대노조에 의한 자주관리는 산업의 20%를 통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1년 가을 루블린과 우츠의 연대노조의 활동가들은 자주관리운동에서 개별기업의 자치권 획득보다도 경제 전반을 장악하기 위한 운동을 중시한다. 연대노조의 자주관리에 의한 생산기구의 장악은 한편으로는 노동자조직에 의한 국가장악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이다. 당시 연대노조의 구성원들의 대다수는 제2의 국회로서의 자주관리의회의 설립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 하먼은 자주관리의회의 설립에 대해 완전히 공허한 슬로건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러한 크리스 하먼의 입장은 그가 도대체 폴란드 연대노조운동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러한 몰이해는 그가 생산양식과 시민사회와 정치의 자본주의적 위상학 그리고 그 레닌주의적 변형에 대해, 그리고 그 위상학 속에서의 노동자조직을 통해 반영된 노동자적 존재의 의미에 대해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자주관리의회란 생산양식과 시민사회로부터 이중적으로 분리된 국회를 대체하고 들어설 새로운 국가기구이다. 폴란드연대노조운동의 의미란 바디우가 말했듯이 노동자에게 고유한 정치적 능력의 발현, 그리고 노동자조직의 연합으로서의 국가의 가능성에 있는 것이다.
노동자조직의 연합으로서의 국가의 가능성은 1980년대의 폴란드에서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먼저 중세자유도시에서 나타난다. 페르낭브로델은 그의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의 제1권에서 다른 대륙의 도시들에 비교한 유럽도시의 특성에 대해 “비길 데 없는 자유의 기치 아래, 나름의 정향에 따라 자율적인 우주를 발전시켰고” 또한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전개한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정리해보면 자유로운 시민 또는 시민단체들이 경제를 자주적으로 통제, 관리하면서 자치적인 도시정치를 전개했다는 것이다. 브로델은 영토국가는 도시의 확대복사판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도시정치와 국가정치 사이에 구조적 단절성이 없음을 말해준다. 즉, 브로델이 중세유럽의 도시에 대해 ‘도시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듯이, 도시정치가 일종의 국가정치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노동하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연합으로서의 중세자유도시가 국가의 한 모델로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로델은 이어서 “핵심적인 것,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은 특정한 도시들이 정치공간을 완전히 폭발시키고 스스로를 자율적인 우주로, ‘도시국가’로 구성한 것이다”라고 하고, “두 주자가 있었다. 국가와 도시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국가가 이기고 도시는 예속되어 무거운 압력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난다. 유럽도시의 최초의 위대한 세기들에 있어서 도시는 적어도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와 독일에서는 완전히 승리한다”고 한다. 도시가 기존의 영토국가로부터 독립성을 획득한 후 스스로를 도시‘국가’로 형성했다는 것이다. 브로델은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막스 베버에 따를 때 서양중세의 자유도시의 발전은 첫째로, 도시 외부의 권력보유자가 도시의 제문제를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숙련된 관리기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점, 둘째로, 도시 외부의 권력보유자들의 이해관심은 화폐수입에 있었고 따라서 시민들이 이를 만족시키면 권력보유자는 시민들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다는 점, 셋째로 도시 외부의 권력보유자들은 상호경쟁하에 있었고 그리하여 시민의 화폐력과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는 점 등에 의해 설명된다. 물론 도시의 자율성 획득이 타협을 통해서 전개된 것은 아니고 혁명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 경우도 많았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영토국가의 권력으로부터의 도시의 해방은 기본적으로 경제력에 입각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동체로서의 도시가 무엇보다도 우선 동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민들이 영토국가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물질적 힘을 가진 ‘생산자’였기 때문이고, 그 시민들이 도시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등한’생산자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세자유도시의 생산관계는 지배관계가 아닌 연합관계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중세자유도시가 ‘자유’도시일 수 있는 비밀이다. 브로델은 “ 이 도시들은 서양에 있어서 최초의 ‘조국들’(patries)이었다. 이 도시들에서의 애국심은 그 이후의 영토국가에서의 애국심보다 명백히 정합적인 것이고 또 훨씬 더 의식적(意識的)인 것이었다”고 한다. 이 도시들이 그 구성원들에게 하나의 ‘조국’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 도시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 다스려지는 ‘그들 자신의’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시민들간의 생산관계가 지배ㆍ착취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생산자들간의 연합적 관계였다는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 “중세의 도시단체는 자기규율적ㆍ자기임명적이며,관리기관으로서 참사회도 가지고 또 그 장(長)으로서 ‘콘술(konsul), '마예르’(Majer), '뷔르거마이스터‘(Bürgemeister)를 갖는다”고 한다. 이때 베버가 ’도시단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도시가 자주적 시민들간의 연합단체 이상의 성격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자주적인 시민들간의 자유로운 연합으로서의 ’도시단체‘는 스스로의 규율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며 따라서 자신들의 공통의 법에 스스로 복종하는 하나의 법단체로서 나타난다. 베버에 따를 때 애초에 서약공동체적 형제맹약에 토대했던 서양중세도시는 “영속적인 정치적 단체로 전화하며, 그 단체소속자는 도시시민의 특별한 신분법의 법단체를 형성한다”고 한다. 형제맹약적 단체에서 시민적 법단체로의 이러한 이행 이외에도 중세자유도시의 형성사는 기사적 생활양식을 갖는 금리생활자로 대표되는 도시문벌에 대항한 동업조합이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하는 과정으로도 특징지원진다. 애초부터 동업조합의 정치적 권력이 강력했던 독일지역 이외에도, 참사회가 문벌에 의해 지배되던 북유럽에서는 동업조합을 배후세력으로 한 시민들의 결합이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그 혁명운동 속에서 동업조합이 더욱 성장하게 된다. 또한 명망가들이 권력을 장악했던 이탈리아 도시의 ‘콩유라티오'는 기업가와 수공업자들로 구성된 ’포폴로‘에 의해 대체 되어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중세자유도시에서 동업조합에 의한 정치적 지배권의 장악이 노동자조직에 의한 정치지배와 생산통제의 결합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중세자유도시에서 동업조합에 의한 정치적 지배권의 행사는 정치와 경제의 자본주의적 분리가 역사적으로 특수한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켜주는 것이다. 베버에 따를때 중세유럽도시의 거의 도처에서 동업조합은 도시의 실질적 통치단체를 구성한다. 동업단체는 도시의 자율적 법을 제정하고, 경찰권을 행사하고, 또한 시민권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독일지역의 뷔리거마이스터를 비롯해서 도시의 수장(首長)은 동업조합의 대표자이다. 이처럼 동업조합의 정치적 권력장악이 가능했던 것은 도시의 자율성이 바로 도시의 경제적 권력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경제적 권력의 담당자로서 동업조합은 도시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사실은 오직 동업 조합만이 도시의 경제적 권력을 더욱 안정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동업조합은 정치적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경제적 권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었다. 즉, 동업조합의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가능하게 하고 재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상호규정적 권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도시경제정책은 바로 도시정치의 핵심을 구성한다.
막스 베버는 중세자유도시의 경제정책의 목적이 대중급양(給養)의 항상성과 공정성 확보, 동업조합이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대에 도시경제정책이 완전히 발전된다고 한다. 베버는 동업조합의 대내적 정책으로 기회균등, 이를 위한 자본력증가 규제, 품질통제, 도제와 노동자 수의 통제, 원료구입 공동대응, 최종생산품에 따른 전문화, 생산과정통제, 경영관리통제를 든다. 생산과정통제로는 공업기술통제, 원료품질통제, 경영기술․상품제작기술 통제, 도구통제, 품질검사 등이 있으며, 경영관리통제로는 장인(마이스터) 간의 지배관계 성립을 방지하기 위한 자본제한, 한 장인이 다른 장인을 위해 일하는 것의 통제, 구매기회 통제, 선점매(先占賣)금지, 외부인의 생산물을 판매하는 것에 대한 금지, 판매통제 등이 있다.
   이러한 도시경제정책의 핵심적 목표는 자유경쟁의 제한을 통한 경제활동의 공생적(共生的) 재생산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제정책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노동자들의 연합으로서의 동업조합에 의한 자율적 권력을 장악한 노동자들의 연합으로서의 동업조합에 의한 자율적 정치로써 행해졌다는 것이다. 중세도시가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 자율성을 영토국가의 권력에 대항하여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였다면 서로간의 극한경쟁을 통해 서로를 파멸시킬 정치를 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에서 경쟁에 따른 상호파괴는 근본적으로 정치와 경제 사이의 생산양식과 시민사회와 정치 사이의 자본주의적 분리에 입각한 것이다.
   맑스는 「『자본론』의 미간행 제6장」에서 자본주의적 재생산양식을 중세동업조합체계의 재생산양식과 비교한다. 맑스는 중세동업조합체계의 재생산양식에서는 노동방법, 노동가격, 직인과 장인의 수가 “동업조합의 규정된 규범”에 의해 엄격히 통제죄고 그 규범은 “의무적인 것으로 준수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규범들의 목표는 “기존하는 소비요구의 전체의 한계 내에서 생산을 유지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장인은 도시의 행정기구에 참가할 정치적 권리를 갖는다고 한다. 모리스 고들리에는 맑스의 이 글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각각의 수공업자는 그들이 속해있는 동업조합을 동시에 재생산한다는 조건하에서 생산을 한다. 생산과정에 부과된 한계는 수공업자들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면서 동시에 같은 동업조합의 다른 수공업자들이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한다. 고들리에의 이 말을 일반화해본다면, 노동자가 생산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며 다른 노동자를 또한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와 사회의 이러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정치화된 노동자 조직의 재생산적 정치인 것이다.  
   중세동업조합체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으로의 이행은 정치화된 노동자 조직의 재생산적 정치가 생산에 대해 부과했던 ‘한계’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한계’가 사라진 토대위에서 발전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타자의 재생산을 파괴하는 성격의 것으로 나타난다. 즉, 한 자본의 가치증식은 다른 자본의 탈가치화를 수반하고 노동의 자기가치화는 자본의 가치저하를 수반하는 것이다. 타 자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계속 자기 시장을 가진 자본으로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리고 계급투쟁에 따른 가치저하의 압박으로부터 부단히 도망치기 위해서는, 하나의 자본은 생산의 기술적 조건을 끊임없이 변형시켜야 한다. 생산의 기술적 조건의 변형은 사회 자체를 더욱더 기술의 지배로 몰아넣는 것이지만 생산력의 해방적 힘을 개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제 생산의 목적은 더 이상 사용가치의 생산이 아니라 오로지 타 자본의 파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산의 해방적 힘은 노동자가 정치적 권력과 생산적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만 개화될 수 있는데, 바로 그 조건하에서만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기술의 지배’가 가능한 것은 그 기술이 노동자를 위한 기술이 아니라 바로 지배자들 간의 상호투쟁과 파괴를 위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위르겐 코가는 19세기 독일의 직인들이 자본주의적 임노동화와 분업화를 수공업적 자부심과 전자본주의적 규범들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러한 자본주의화가 다른 한편으로는 장인에 대한 직인의 인격적 구속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중세자유도시의 자율적 사회관계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맑스는 인도의 전자본주의적 공동체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는 이 목가적인 촌락공동체들이 그들의 비공격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동양적 전제주의의 단단한 기초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인간의 이성을 미신의 양순한 도구화 그리고 정해진 규칙들의 노예화하면서 극도로 협소한 틀 속에 가두어 버렸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중세자유도시에 대한 준거를 전자본주의적 과거에 대한 회귀에의 시도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예속적 개인성들의 공존에서 자립적 개인성들의 공존으로의 이행이다. 브로델이 말했듯이 일종의 국가로서의 중세자유도시에 있어서 노동자조직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은 단지 우리에게 국가는 노동자조직의 연합적 기구 이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맑스주의의 결정적 기여는 자유와 평등으로 개념화된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보편주의가 시민사회적 보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시민사회가 생산양식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생산양식과 정치에 내재된 지배관계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보편주의는 인간의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동일성이란 전제하에서 보편주의는 각각의 인간들이 서로를 동일한 권리를 갖는 주체로서 상호인정을 한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갖는다. 예컨대 주체들은 타자의 노동속에서 자신의 노동의 등가물을 보아 서로간의 상호인정을 행하고 동등한 노동의 주체라는 자격하에 교환을 매개로 하여 보편주의를 실현한다. 그러나 노동자와 비노동자는 상호인정을 할 수 없다. 특히 후자가 전자를 노동시켜 그 결과를 착취하기 위해서는 전자를 보편적 권리의 공간으로부터 축출시켜야 한다. 시민사회적 보편주의는 생산양식과 정치에서의 보편적 권리의 상호인정이 부재한 상태에서 오로지 법적 주체의 자격으로서 행해지는 상호인정에만 기초한 것으로, 결국에는 생산양식과 정치의 층위에서의 계급적 특수성에 의해 굴절된 것이다. 노동하는 주체들간의 상호인정이 행해지는 진정한 보편주의는 생산양식이 시민사회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정치화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생산양식의 담지자들이 더 이상 생산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과 생산의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것, 즉 국가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글의 서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노동자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이 노동조직의 성격과 정치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 못함을 보았다. 레닌주의적 사회구성에서의 노동조합은 그나마 시민사회적 주체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폴란드 연대노조운동의 구상 속에서 그려지고 중세자유도시에서는 실제로 실현되었듯이 노동자조직의 연합이 바로 국가기구를 구성하고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았다. 노동자조직의 역사적 존재형태는 바로 노동자의 역사적 존재형태를 드러내준다. 노동자의 존재에 있어서 주체성의 박탈은 그 정치성의 박탈에 의해 매개된다. 이때 정치성이란 노동자가 곧 국가이다는 것을 함의한다.
   진정한 보편주의는 노동에 있어서의 주체성의 복원과 더불어 사적 공간에 있어서의 공존적 주체성의 존재를 그 두 가지 근본적 조건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이 두 영역의 주체성은 서로 분리되어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세계에서의 주체성은 사적 공간의 주체성에 의해 근본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사적 공간에서의 주체성의 이행은 노동세계에서의 주체성의 이행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이제 우리는 노동에서의 주체성을 규정하는 사적 공간에서의 주체성으로 넘어간다. 앞으로 우리는 진정한 보편주의란 오이디푸스적 주체성을 이행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출처 : 주체성의 이행 / 이종영 / 백의 / 1997 / p.70~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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